19세기 이후 지금까지 '반기독교의 대명사'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독일, 1844~1900)는 왜 변절자가 되었을까? 그에게는 끝내 신의 기름 부음이 없었을까? 근대 과학·이성 문명의 격변이 그를 우주의 반항아로 몰아갔을까?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 목사였다. 하지만 5세에 질병으로 그의 곁을 떠났다. 그 후 할머니, 어머니, 고모 둘, 여동생 등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했다. 그는 신학도 전공했다. 그러나 중도에 그만두고 고전 문헌학에 심취하였다. 24세에 그의 천재성으로 말미암아 바젤대학 교수가 되었다. 10년 후 건강 이상으로 사직하고, 요양 생활 중에 본격적으로 종교, 도덕, 철학 등 서구 전반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망치를 들었다. 급기야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일격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기독교 가치관인 초월적 가치와 도덕, 섬김, 겸손 등등이 인간의 무한한 성장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수었다. 대신 새로운 인간 '초인'을 제시했다. 칼 야스퍼스가 말했다. (《니체와 기독교》 이진오 옮김. 현실사, 2006).
"니체가 기독교를 악의적으로 없애거나 기독교를 후퇴시키거나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오려고 한 시도는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딛고 올라 능가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거기에 안식이나 행복이 있을 리 없었다. 정신병으로 10여 년 앓고 55세에 생을 마감할 때, 그는 초인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파장은 컸다.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이후 그는 반기독자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반기독자들이 그의 망치를 환호하며 그의 이름 앞세우기를 좋아하는 까닭이다.
니체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레프 톨스토이(러시아, 1928~1910)는 작가로서 대성한 최정점 50세에 인생의 허무와 마주쳤다. 하여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참회록>을 쓰며 신에게 돌아섰다. 그 후 작품들을 통해서 보여준 그의 신심은 투철했다. 그중 하나가 그의 3대 걸작에 속하는 《부활》(혜성전자책, 2020)이다. '부활'은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그의 기독교 가치관을 여러 각도에서 잘 보여준다.
먼저, 한순간 여자를 밤의 쾌락으로 쓰고 잊었다가 10년 만에 죄수와 배심원으로 만나 죄책감을 느끼고, 그녀를 돕는 한 남자의 회심에 머물지 않는다. 점차 변화하는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말, 혹은 삶을 통해서 톨스토이가 가진 기독교 사상 및 인생 전반에 걸친 다각적인 관점이 드러난다. 경찰과 사법제도, 감옥과 유형 등 국가에 대한 비판도 가감 없이 담았다.
그중의 하나는 땀 흘리는 농민은 가난하게 살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지주와 귀족은 농민을 착취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제도의 부당함이다. 다른 하나는 무고한 사람들이 법률의 도움을 받지 못해 죄인으로 갇힐 수밖에 없는 감옥과 유형의 부조리이다. 하여 주인공은 시베리아까지 여자를 따라가서 여관방에서 성경을 읽으며,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한다.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그녀와 결혼하자!' 그리곤 굳은 결심의 표정으로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주여, 저를 구하소서. 보살펴주소서. 제 가슴으로 들어오시어 저의 추악함을 씻어주소서! 제 몸에 깃들어 있는 죄악의 뿌리를 씻어주소서." 그는 신의 구원을 간구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솟구쳤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고 슬픔의 눈물이기도 했다. 기쁨의 눈물은 자신의 내부에서 빠져나올 줄 모르던 정신적 존재가 눈뜬 것에 대한 벅참이었고, 슬픔의 눈물이란 자신의 성향을 찾은 것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다."
"그런 일을 적어도 자기만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네흘류도프는 생각했다. '토지는 소유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물이나 공기나 태양과 마찬가지로 매매의 대상도 될 수 없다. 토지와 토지가 인간에게 주는 특전에 대해 모든 사람은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죄가 없어요. 제가 어떻게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였겠어요?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죄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유능한 변호사에 달려 있다고요."
"네흘류도프는 지금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그 무서운 악에서 구원될 방법은 오직 하나, 사람들이 항상 자기를 신에 대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므로 남을 단죄하거나 교화시킬 만한 힘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깨닫는 것뿐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곳에서 새 황제에 대한 선서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다시 야쿠츠크로 유형되었다. 이렇듯 그는 한창 젊은 나이에 감옥과 유형지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은 그를 더욱 이 일에 진력하게 했으며 열성적이며 활동적인 사나이로 만들었다. 그는 조금만 자유로워지면 스스로에게 주어진 목적을 위해 일하는 사람, 농민들의 계몽과 단결을 위해 일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주어진 조건 아래서 자기만이 아니라 동료 전체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정열적이고 현실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 더러운 공기 속에 감금된 수백수천 명의 치욕을 당한 사람들, 굴욕을 참아가며 생명의 끈을 잡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금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미치광이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이 모든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미치광이인지 저 마음 깊은 곳에서 해답을 요구했지만, 그 해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테이블 위에 있는 성경책을 집어 들었다. 이 성경책은 영국인이 기념으로 준 것이었다. 그러면서 감옥을 둘러본 영국인이 네흘류도프에게 말했다. “여기 이 속에 모든 해결이 있습니다.” 그는 그 말의 울림을 듣고 있었다. 무심코 성경을 펼쳤다. 그리고 펼쳐진 곳을 읽기 시작했다. <마태복음> 제18장이었다.•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100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그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그럼에도 톨스토이는 '부활'로 인해 1901년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세속 권력과 결탁한 교회와 사제에 대한 비판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부패한 교회가 아닌, 성경 자체의 진리에 심취했다. 부귀영화가 아니라 가난한 민중들의 삶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았다. 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과 함께 사는 것'으로 기독교 사랑을 구현했다. 이른바 '톨스토이 교'라고 불릴만한 구별된 삶이었다.
니체와 톨스토이, 당신은 어느 편인가? 혹자는 니체 편일 것이다. 신을 죽이거나 족쇄를 풀었다고 믿으니. 당신의 의지로 초인을 목표로 마음껏 날 수 있으니. 하지만 대성하여 초인이 되었으나 인생의 절대적 진실인 허무 앞에 무릎 꿇은 톨스토이의 회심을 가슴에 담는 이들은 톨스토이 편에 설 것이다. 니체가 거기에 도달했더라면 신이 없는 초인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을 알므로. 아름다운 봄, 예수의 부활이 당신의 부활이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