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만만해?
우리 사이의 제일 먼저 해야 할 숙제, 친해지기! 우선 편한 사이가 되어야 뭐가 됐든, 뭐라도 하지 않겠는가.
연락하는데도 기술이 필요했다. 부담스럽지 않게. 축구 이야기는 필수! 선생님이 늘 생각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부지런함도 더하고, 고리타분한 꼰대 선생님이 아니란 것도 어필해야 되고, 그러려면 일단 잔소리도 금지.
상담을 할 때도 아파트 앞 벤치나 동네 카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서 일상을 나눴다.
"고등학교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이 들 때 즈음 본론(?)으로 들어갔다. "잘 모르겠어요.", "일단 입학 원서는 제출하고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 어떻겠니? 지금 당장 뭐 할지 계획이 없다면 학교 다니면서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은데. 다녀보다 정 아니다 싶으면 그때 그만둬둬 되잖아."
딱 여기까지. 더 이야기하면 '고등학교 꼭 가야 돼!'처럼 들릴까 봐 치고 빠지기 스킬을 시전 했다.
"생각해 볼게요." 진형이는 본인의 생각과 다르거나 제안을 거절할 때에도 상대방을 배려해 싫다는 말 대신 '생각해 볼게요.'라고 말하는 아이였다.
며칠 뒤, '선생님 저 고등학교 갈게요.'라는 답이 왔다. 거절이 아니었네? 응? 사례관리 쉽네? 진형이 어머니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안 가겠다고 했는데 선생님이 어떻게 말했는지 이제는 다 간다고 하네요.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연락이 왔다.
진형이에게는 어쩌면 큰 결정이었겠지만 나로선 너무 수월하게(?)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하는 것 같아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어머니께서 마음 써주셔서 진형이도 그런 결정을 한 것 같아요. 애 많이 쓰셨어요!'라고 공을 어머니에게 돌렸다.
그러고 보름 뒤 중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진형이 어머니에겐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날이었고 마치 이날을 위해 살아오신 것처럼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에 반해 진형이는 감정의 변화가 크지 않았고 "다 중학교는 졸업하잖아요."라고 했다. 옛끼 이놈!
암튼, "진형아 졸업 축하한다, 어머니도 축하해요! 어머니 오늘 진형이가 좋아하는 거, 맛있는 거 많이 사주세요!" 하고 축하를 더했다.
2020년 3월,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입학식도, 고등학교 첫 수업도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고 여전히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물론 사례관리자인 나와도 보는 듯 마는 듯했다.
거리두기 단계가 오르락내리락할 때 그 틈을 잘 살펴 조심히 만났다.
진형이는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어 본인이 쓰고 싶은데 쓰고 싶다고 했고, 살이 계속 쪄 운동도 하고 싶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많지 않았고 낯을 가리는 진형이 성격도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였다.
그중에 시간이 맞는 편의점 알바를 하기 위해 면접까지 보러 갔지만 숫기 없는 모습에 사장님은 진형이에게 일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운동.
진형 : "예전부터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혼자 할 수 없잖아요. 그냥 뛰고 헬스 하는 운동은 재미없고."
상현 : "그럼 선생님 축구하러 갈 때 같이 갈까?"
진형 : "축구 안 한 지 2년이나 되었어요. 체력도 없고 너무 못해서 좀 부끄러울 것 같기도 해요."
상현 : "음. 그럼 선생님이랑 1:1로 할까? 기본기, 패스, 체력 훈련 같은 거. 그리고 선생님 축구 잘해. 너 선생님 공 못 뺐을걸?"
진형 : "하하하하하."
상현: "왜 웃어? 선생님이 만만해?"
진형 : "그래도 선생님한테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상현: "오호. 이것 봐라. 그래 운동장에서 보자!"
이렇게나 흥미로워하다니. 진형이의 빅 스마일을 처음 봤다. 만만한 선생님. 내가 만만해져서 진형이도 편하게 대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지만, 아니, 감히, 나의 축구 실력을 보지도 않고 비웃다니. 옛끼 이놈!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운동하기로 약속했다. 시간은 오전 10시.
대망의 D-1
진형이는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기대와 걱정. 그 큰 '기대'와 '걱정'을 두 팔로 와락 안고 잘려니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