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미국 생활 100일 소회
6월 22일에 미국에 도착했으니 정확히 100일이 지났다. 입국 한 달 차라고 기념으로 SNS에 글을 남겼는데, 어느덧 시간이 더 흘러 100일이 되었다. 신생아도 100일이면 새벽마다 깨어서 엄마젖을 찼던 것을 멈추고 인간답게 푹 잠을 자기 시작하는 시기인데, 나의 미국 생활은 100일 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돌아보기로 했다. 사실 대단한 변화를 체감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 이지민, 생활에 큰 변화를 주고 난 후의 100일이라 나 자신과 내 주변을 한번 돌아보는 건 의미 있을 거 같아서 관련해서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1. 나는 대략 7킬로 정도 체중이 줄었다.
엄청난 다이어트를 한 것도, 미국에 왔다고 갑자기 vegan이 된 건 아니다. 또한 몸짱이 되고자 매일같이 피트니스 센터를 출입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서 정확히 체중을 잰 적은 없지만, 나는 아마 80킬로 정도 되었을 거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체중이 많이 나갔지 않았나 싶다. 그것도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보통 근력운동을 많이 하면 지방은 줄어도 근육이 늘어 체중이 늘어나는 데, 나는 반대로 '송별회'를 한답시고, 거의 매일 저녁 사람들을 만나느라 고열량 식사, 술자리의 연속이었으므로 체중이 늘어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최근에 아마존에서 체중계를 주문했는데, 대략 158~162파운드를 왔다 갔다 ㅎ하므로 (71~73킬로 정도), 대략 7킬로 남짓 줄은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찌 보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때의 내 적정 체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나도 모르게 강제 다이어트(?)가 되었을지도??
[마트 앞에 전시해 놓은 호박들, 할로윈이 다가오고 있다]
2. 영어 실력은 딱히 느는 것 같지 않다.
내가 만약에 미국에 있는 회사를 다니거나,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더라면 아마 100일간 영어 실력이 크게 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재는 일을 하지도 않고, 주기적으로 수업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상생활에서 쓰는 영어라고는 아주 간단한 인사나 물건을 살 때 필요한 정도의 영어만 쓰고 있다. 주로 만나는 사람 또한 가족이 대부분이므로 생활 속에서 영어를 쓸 일은 크게 없다. 물론 이런저런 일로 전화로 영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가끔 있긴 하지만(아직도 전화로 하는 영어가 가장 곤욕스럽다), 내 영어는 한국에 있을 때랑 큰 차이는 없다. 오히려 업무를 영어로 해야 했던 멕시코, 필리핀 주재원 시절에는 영어 말하기, 쓰기, 듣기에 주저함이 적었던 거 같다. 가끔 의도적으로 로컬 라디오, TV 뉴스를 들으려고 노력한다. 그나마 귀라도 트여야 미국 생활이 좀 수월하지 않을까 해서다.
3.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건 뭐 휴직 상태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이란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회사생활이란 걸 하지 않으니 인간관계가 제한 적이고, 자연스레 저녁 약속이 없으니, 저녁은 거의 대부분 가족과 함께 먹게 된다. (물론 아침, 점심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미국 회사를 다닌다 해도, 여기 정서상 '회식'이란 것도 거의 없을 것이다. 아이 학교의 pick, drop도 와이프보다 더 많이 하게 되고, 아이의 방과 후에 낚시, 골프 등을 하면서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가끔은 회사 동료들과의 소주 한잔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 그만큼의 시간을 가족과 더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특히나 출퇴근 시간이 많이 소요되다 보니, 아침 7시 전에 나가서(가족들은 모두 자고 있다) 집에 아무리 빨리와도 7시, 조금 늦으면 9시, 10시가 되다 보니 주중에는 아이의 얼굴을 거의 못 보고 살았었다.
[가족과 처음으로 나가본 골프 라운딩, 아이의 캐디 역할 하느라 바빴지만 이렇게 같이할 수 있는 스포츠가 생겨서 기쁘다]
4. 미국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땅 덩어리가 넓고,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 보니(서버브 기준) 차가 없으면 생활 자체가 어려운 구조. 뭘 하나 하더라도 차를 타고 5~15분 정도는 기본으로 소요된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이상하게 빨리 가는 기분이며, 실제로 그래서 더 빠르게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 학교 데려다주고, 마트 잠깐 들렀다 집에 오면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 이래 저래 정리 좀 하고, 운동 좀 하면 아이 데려올 시간, 데리고 오면 이래저래 저녁시간. 쓰고 나니 무슨 주부의 하루 같기도 하지만 실제 체감하는 내 하루는 이렇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다가 정말 1년도 금방 지나갈 기세다.
그래서, 나는 예전보다 더 행복해졌는가? 이 질문을 나한테도 하고, 내 와이프에게도 한 적이 있다. 대답은 '아직 잘 모르겠다'이다. 너무나도 좋은 자연환경(아침저녁으로 아름다운 하늘과 동네마다 우거진 수풀, 호수, 깨끗한 공기 - 일주일간 새 차를 안 해도 차가 깨끗하다), 한국보다 뭔가 느긋하고 여유 있는 일상생활(도로도 한적, 식당, 마트 등 어디를 가도 북적이는 인파를 보기 힘들다)은 좋지만, 그래도 외국에, 그리고 미국이란 나라에 언어가 완벽하지 않은 동양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가끔은 서글퍼질 때가 있다. 하루키가 언급했던 '슬픈 외국어' 현상인 것이다. 그리고 한국과 비교해서는 무지무지하게 심심하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미국은 정말 '지루한 천국'인가 보다.
[요즘 나의 슬픈 외국어를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 대선 군]
*표지설명: 동네 부근 apple picking 다녀왔던 사진. ‘맥킨토시’는 진짜 사과 품종의 이름이었다. 아오리, 국광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