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미나리
어느덧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햇살이 뜨거울 때 시카고에 도착했는데, 어느덧 단풍마저 저물고 11월 초겨울의 문턱에 와 있다. 미국은 핼러윈 데이가 10월 마지막 날(요일은 상관하지 않는다)이어서 오전에 들른 집 근처 도서관에도 직원들 모두 코스튬을 입고 해맑은 표정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해주고 있다. 미국에 와서 '브런치'라는 것도 시작하게 되고, 4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 글을 포함 총 20개의 글을 업로드하였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없으니, 외부에 내 생각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이러저러한 이유들로 브런치 또한 100%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서도) 유일한 소통 창구이자, 나에겐 일종의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아직은 구독자라 할 수 있는 유의미한 숫자도 아니고, 조회수도 미미한 어찌 보면 내 기존 SNS만도 못한 트래픽이지만, 원래 트래픽이 목적이 아닌 내 개인적인 공간의 의미가 컸으므로 아쉬움은 없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또 다른 형태로 '일상'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나니, 불현듯 내가 여기에 온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 등을 돌아보게 되었다. 미국에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마치 '코끼리 열차'에라도 올라탄 것처럼 비자 획득을 위한 준비와 실행, 한국 직장 및 집 정리, 미국 정착 등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바쁘게만 지나왔던 지난 1년여 였다. 새로운 환경과 일상에 적응하느라 그동안 분주하게 지내다 보니, 내 자신보다는 가족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 특히나 새로운 학교에 또다시 적응해야만 하는 아이에게 온갖 정신이 팔렸있었다. 다행히 아이는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하게 되었고, 이전보다 학업에의 집중력도 높아져있었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동갑내기 사촌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듯싶다. 물론 아직 학교생활이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만약 아이가 학교 적응이 어려웠다면, 우리 가족은 또다시 한국으로 이삿짐을 싸야 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출국 전, 화제가 된 영화 '미나리'를 보았다. 극 중에 아빠 역할로 나온 '스티브 연'에게 나는 감정 이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처럼 보이기도 했고, 영화 속에서 번뇌하는 그의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약간의 미국 영화스러운 양념이 더해져서 '한'에 익숙한 한국사람으로서 보기에는 그 '슬픔'의 정도가 다소 밋밋하다는 느낌도 받았지만(영화 미나리에는 흔히 우리가 예상하는 '인종차별' 이라던지, 누가 죽는다던지 하는 극단적인 위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 사람이 보기에는 약간 순한 맛처럼 느껴질 것이다),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 그것도 미국이라는 타지에서 힘든 일(병아리 감별, 농사 등)을 하며 본인의 꿈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그의 모습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미나리'가 우리 얘기 일까 하고 물어보자 와이프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영화 '미나리'처럼 desperate 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막상 미국에 도착해서 몇 달을 지내다 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이 스멀스멀 떠 오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네트 워킹했던 모습, 아직까지는 살아있는 내 커리어,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소통했던 동료들, 힘들 때마다 얼굴 보고 서로 위로받을 수 있던 친구들, 아직도 내 걱정 많이 하시면서 티 안 내려고 노력하시는 부모님 등등 말이다. 미국에 오려고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이제 와서 내가 내려놨던 것들에 대해서 아쉬움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간사한 인간인가 보다.
'1년 지내보고 가족 중 1명이라도 unhappy 하다면 돌아온다'라는 원칙을 와이프와 미리 세우고 미국에 오기는 했지만, 온 가족이 다시 한번 태평양을 건너는 일은 아주 가벼운 일은 아니며, 향후 30~40년 또는 그 이상, 아이의 미래가 모두 걸려있는 중요한 결정이다. 이런 저러한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는 아직 '적응'이 안되었는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가을이 와서 멜랑꼴리함과 homesick이 콜라보로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해방 일지'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연재는 20회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 또는 나 스스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며 미국으로 와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였고, 미국 생활 초보자 수준의 시선으로 이런저런 주제의 얘기들을 가볍게 올렸던 시리즈였다. 앞으로는 조금 더 '일상'에 대한 얘기들, 미국 생활에 대한 다양한 얘기들을 조금 더 파고들어 써보고자 한다. 일종의 '해방 후 새로운 적응기'가 될 것 같다. 오늘 미국은 핼러윈 데이 당일인데 한국에서 들려온 충격적 비보에 마음이 좋지 않은 핼러윈데이다. 꽃다운 청년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