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라 부를 수 없는 온기

시 〈사평역에서〉

by 디디온

어린 시절 다니던 시골교회에는 톱밥난로가 있었다. 강릉 바닷가 마을에는 겨울이면 눈이 펑펑 내려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길이 지워졌다. 바다만 빼고 모래사장과 바닷가 솔밭에는 겨우 내내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이 내리는 한겨울이 되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숙제를 마치고 매일 예배당에 모였다. 조금씩 외롭고 조금씩 가난하고 조금씩 포근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막을 올릴 연극 준비를 하는 꼬맹이들 옆에는 톱밥난로가 있었다. 불이 훨훨 타는 장작난로보다 톱밥가루가 타들어가며 내어주는 온기는 정겨웠다. 예배당 불을 모두 끄면 크리스마스 트리에 솔방울처럼 매달린 전구와 톱밥난로의 붉은빛이 초롱초롱 별처럼 빛났다. 가끔 장난기가 발동해 톱밥난로 불구멍을 후후 불면 불붙은 톱밥가루가 공기 중에서 흩어져 반짝이다 금방 빛을 잃어버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 마음은 따뜻하면서도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슬픔을 느꼈다.


시 〈사평역에서〉를 떠올릴 때면 어린 시절 교회에서 보았던 톱밥난로와 강릉의 눈이 생각난다. 1976년 시인이 군대 입대 환송 술자리에서 낭독한 시 〈사평역에서〉는 이후 시인의 후배들이 입영 환송회에서 낭송해 주는 시가 되었다가, 시의 온기에 기대고 싶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시가 되었다. 겨울이면 오래전 읽었던 낡은 시집을 꺼내 시를 다시 읽는다. 세상을 버리고 싶도록 외로울 때면 사평역이 떠오른다. 사평역 대합실에 가면 세상을 버리고 다시 얻은 텅 빈 희망에 온기가 지펴질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에. 변두리로 밀려난 자들이 와서 잠깐 손을 쬐며 몸을 녹이듯 언 마음을 녹이는 곳.


서울에서 살면서 겨울이면 눈이 거의 오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그것은 마치 불임과도 같이 느껴졌다. 겨울이 당연히 품어야 할 눈이 부족한 서울은 불임의 도시처럼 생각되었다. 강릉의 겨울은 어린 내 키만큼 눈이 쌓이던 곳이었다. 눈이 오면 절망도 눈물도 넋두리도 눈을 덮고 누웠다. 언제 그런 것이 있었느냐는 듯 세상은 고요하고 빛나고 포근했다.


기다리는 것은 원래 오지 않는 법이다. 기다리는 막차도 그러한 이치로 좀처럼 오지 않는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추웠다 포근했다, 희망이 보였다 다시 절망의 등을 보고, 어쩌면 오늘은 막차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 〈사평역에서〉을 읽으면 시의 광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지만, 시 ‘사평역’의 배경으로 그려지는 ‘사평역’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역이라고 한다. 시의 배경인 ‘사평역’ 답사를 갔던 김훈은 “사평은 어디에도 없고 우리들 마음 어디에도 있다”라고 썼다. 없는 사평역의 정경이 읽는 사람의 등을 어루만져준다. 세상의 고통이 있기에 시가 있고, 오늘 나는 시를 읽는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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