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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종 Dec 29. 2023

프리랜서 쉬는 날

70년 전통과 3분짜장의 마음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새벽 두시에 담당자님과 연락을 주고 받는 날짜도 시간도 개념 없이 살다가 25일이 지나자 크리스마스의 환상이 훅하고 사라지듯 매일 밤낮으로 문 두드리며 나를 찾던 일은 갑자기 발길을 뚝 끊어버렸다.

바쁠 때는 제발 하루만 쉬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막상 쉬게되니까 일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처럼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그동안 못 놀았던 한을 풀기위해 이삼일을 아무생각 없이 놀기만했다. 즐거움의 도파민이 끝없이 오르다 한풀 잠잠해질때쯤 이번에는 스멀스멀 불안이 찾아왔다. 하루종일 흥청망청 놀다가는 다음달 내 통장은 텅장이 되고 나의 미래도 깜깜해지겠지싶었다.

 

잠깐일지 한달일지 모르는 이 붕 떠버린 시간을 좀 더 현명하게 보내고 싶어졌다. 마치 70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순대국밥집 육수를 우리는 마음으로 나의 기술을 갈고 닦으면서 비어있는 포트폴리오도 채우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졌고 잃어버린 하루의 루틴을 찾기 시작했다.


당분간 나의 (외주)쉬는 날 루틴은 이러하다.

- 아침 8시 30분 기상

- 9시 동네 산책

- 9시 30분 샤워 및 집 청소

- 11시쯤 작업하기 

- 1시쯤 점심식사 

- 3시쯤 작업하기    

- 8시쯤 저녁식사 및 휴식 시작 

- 11시쯤 수면  

아직 점심식사이후로는 불규칙하기 때문에 -시뒤에 '쯤'이 붙는다. 이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3km의 길을 걷는 동네 산책이다. 요즘은 날이 추워 살짝 얼어버린 길을 조심조심 걸어야한다. 길가의 새나 어딘가를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풀숲에 누워버린 자전거, 맑고 청량한 겨울 하늘, 여름에 비해 초라해진 나무등을 구경하는 시간은 참 즐겁다. 


쉬는 날의 작업은 주로 이런 것을 한다.

- 개인 작업 스케치 및 채색

- 그간 그린 그림들 정리

- 여러 사이트에 그림 업로드

- 아무거나 그리는 아이디어 스케치

- 판매용 제품 제작 

여기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아무거나 그리는 아이디어 스케치다. 30분의 타이머를 맞추고 종이여러장에 아무거나 그리는 시간인데 그림을 그리는 그림체도 이전의 나와는 다른 아무거나여야하기 때문에 최대한 머리와 의사소통을 안 하고 오로지 마음과 손이 먼저, 머리는 행동을 처리하기 위한 수단정도로만 움직이도록 노력한다. 이때 주로 그리게되는 그림은 나비 그림이다. 앗 또 나비를 그리다니? 하지만 열마리든 스무마리든 그리고 싶은 만큼 나비를 그린다. 큰나비, 작은 나비, 줄무늬나비, 털이 복슬복슬한 나비등 다양한 나비가 있다.


아직은 70년 전통의 깊은 맛이 아닌 인스턴트 3분 짜장같은 맛이 나는 초보 프리랜서지만 언젠가 나만의 시간들이 모이고 모이면 어느정도 구수한 향이 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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