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버트 4

by 엘레강스박

결국 나는 머리만 다시 묶고 민낯으로 집을 나서고 있었다.

C의 집에 도착해 보니 아직 친구들은 없었고 길버트 혼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나도 쭈뼛쭈뼛 들어가 TV 앞에 앉았다.

화면에는 이동국 선수가 필드를 누비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않고 있길래 어색함을 깬다고 내가 말했다.

"이동국 귀엽긴 하지."

그는 채널을 돌렸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가수 김현정 씨가 나와 '그녀와의 이별'을 부르고 있었다.

"김현정 팔다리 긴 것 봐. 춤추는 것 참 시원시원하다."

여전히 눈을 화면에 고정시킨 채 길버트가 말했다.

그의 말에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키 작고 팔다리 짧은 내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얼른 왔으면 해서 현관문만 바라보고 있는데, C가 그의 여자친구와 집으로 들어왔다.

함께 볼 친구들을 불러 모으는 데는 실패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휴대폰 가진 애들이 얼마 되지 않아서 연락이 쉽지 않았으니까.


우리 넷은 길버트가 타고 온 그의 아버지 차로 고갯마루에 있는 찻집으로 갔다.

길버트가 주차하는 사이 C와 C의 여자친구는 앞서서 찻집 야외 테이블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연인인 그들과 발맞춰 걷기가 어색해서 거리를 두고 뒤따라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다가와 팔을 둘러 내 어깨를 감싸는 길버트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던 그 짧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또 심장이 나대어서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직도 한이 되는 것은 -사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당황한 내가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멋지게 화를 내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날도 그 후의 일은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다.

띄엄띄엄한 기억이라고는,

내가 사족을 못쓰는 커피를 놔두고 그 6월의 날씨에 좋아하지도 않는 뜨거운 유자차를 마시고 있었다는 것.

'연락해라' 하던 길버트의 음성.

그들과 헤어져 만복상회로 돌아왔을 때 주머니 속에 길버트가 적어 준 쪽지가 있었고,

017로 시작하는 그의 전화번호가 있었다는 것.


며칠째 공중전화박스 앞을 기웃거리는지 모르겠다.

집전화로 걸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C의 집 근처까지 가야 하는 공중전화를 찾았다.

그가 적어준 전화번호 쪽지를 하도 만지작거려서 해지려 할 때쯤, 공중전화 카드를 넣고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고 "여보세요?"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지은 양 깜짝 놀란 내가 수화기를 내려놓아 버렸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한껏 낮춘 목소리가 도서관인 듯했다.

연락하라고 해서 전화는 했지만 할 말이 없다.

그는 이제 복학해서 공부하기도 벅찰 텐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말 한마디 없이 다시 전화를 끊어버린 나는 그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행여나 다시 보고 그 번호를 기억할까 봐 형체를 알 수 없게 찢어버렸다.


겨울방학에도 나는 만복상회에 있었다.

크리스마스였다.

그날도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앉아있다가 가게 유리문에 입김을 불어 낙서를 했다.

"이런 날 집에서 뭐 하냐?"

길버트였다.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나를 본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본 친구에게 그렇게 할 말이 없는 것인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나를 놀리는 그의 말에 짜증이 났다.

그 봄날 그 소풍에서 그의 눈이 진지해 보였던 건 그냥 내 착각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도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뜨거운 밤을 보냈거든."

"......"

나의 19금 발언에 길버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제 갈길을 갔다.

나는 가게 안에 몸을 숨긴 채, 고개만 내밀어 멀어지는 그를 보고 있었다.

문득 나의 애처로운 짝사랑도 이젠 제 갈길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중학교 동창들의 모임이 있어서 시내로 나갔다.

저녁을 함께 하려고 모인 친구들은 열명 남짓 되었다.

각자의 수다로 시끄러운 공간에서도

맞은편에 앉은 길버트가 옆에 앉은 남자동창에게 하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 그래 그 성탄절에 엘레강스를 봤는데, 쟤가 뭐라는지 알아?......"

길버트가 열을 올리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 남자 동창은 그걸 왜 들어야 하냐는 표정으로 먹던 음식만 계속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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