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쟁취했지.
*사진 : 게티이미지
때는 바야흐로 1987년 , 87학번 새내기시절.
우리는 (감히 그렇게 얘기해 본다) 6.10 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어낸 세대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말도 안 되는 시대를 살아냈는지 스스로도 대견할 때가 있다.
학생이 죽었다.
박종철 열사가, 이한열 열사가 그렇게 아프고 슬픈 모습으로 사라져 버렸다.
당시 부모님들은 자녀가 대학생이 되었다는 대견함과 동시에 생기는 큰 걱정이 한 가지 있었으니 , 당부당부 하시기를 "데모질! 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데모질...
지긋지긋한 최루탄향을 맡으며 청춘을 보낸 우리들이다.
교문을 넘어 쳐들어오는 전경의 손에 학우가 끌려나가는 모습, 여학생듵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고 가는 또래의 희생양 전경들.
더운 여름 솜옷으로 무장한 엣띤 전경들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불붙는 순간도 목격을 했고
그럴 땐 박수가 터졌던 슬픈 기억.
지금은 내 아들이 군에 가 있는데 , 연관 지어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시험 좀 제때 보자 는 구호를 외치고 다녔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전모를 학생회관에 모여 시청하며 부들부들 떨었고
무엇보다 우리의 피는 스무 살 , 완전히 끓어오르는 피 끓는 청춘들이었다.
당시 북가좌동에 거주하던 난
청파동 학교까지 등교한다는 게 녹록지 않았다.
버스에 올라 출발, 잠시 후 연대 앞을 지난다.
최루향기 맡으며 통과하면 다행. 가끔 거기까지.. 가 끝인 날도 많았다.
가까스로 통과하여 아현동에 다다르면 아현교회 앞에서 또 한 번 이 곤욕을 치르고
어찌어찌 통과하여 서울역쯤 다다르면 또 한 번.
이렇게 학교 앞에 도착하면
양옆으로 사열해 서있는 전경들을 힐끔힐끔 봐가며 학교로 들어갔고
수업 중에도 (음대는 바로 교문 앞) 못 볼 꼴을 보고
축제날도 어김없이 울며 집에 돌아갔었다.
학교 앞에서 열을 지어 명동으로 향하다가 전경들에게 둘러싸여 포위당했을 때도
누군가의 뛰어! 소리에 힘입어 냅다 달려 도망질했더랬지...
어느 날.
연대 노천극장까지 줄지어 들어갔던 그날
난 그만 밤샘농성을 한다는 사실에 기겁을 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
나라를 위해 큰 목소리 내며 목숨도 아깝지 않을 기세등등했던 나.
그런데....
밤샘농성=외박
이라는 커다란 장벽을 만난 것이다. 이런...
외박이라니...!!!
"난 부모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가 밀려왔다. 그리고
십여분을 망설이다가 과감하게 일어섰다.
노천극장에서 정문까지 백양로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지만
난 혼자 총총걸음으로 정문까지 걸어갔으며
버스가 오갈 리 없는 , 정적이 흐르는 팔 차선 도로 앞까지
걸어갔다. 길건네에는 전경들이 어마무시 포진해 있고
다시 지하도를 쫑쫑건너 전경숲을 헤집고 나가 신촌역까지 걸어갔다.
아마 수많은 눈들이 나를 보고 있었을 터..,
죽어도 외박만큼은 할 수 없었던 1학년 대학생.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만..
(당시 나의 통금시간은 9시. 내가 먼저냐 전두환이 먼저냐 다투며 귀가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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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야든동
우리는 그랬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고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했더랬지.
다시한번
어떻게 그 시절을 살아냈는가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힌다.
이렇게 쟁취한 민주대한민국이다.
그로부터 38년이 흘렀다니.. 믿을 수가 없네..
아차 하면, 이런 광경을 다시 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다.
부디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 한다.
시위는 전국의 주요 도시 한복판에서 매일 벌어졌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림출처 :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