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남는 건 꿈꾸는 마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며칠 전 내 아이에게도 얘기했었다.
“엄마가… 이 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닦달하고, 순간순간 네 공부를 챙기고 뒷바라지했더라면 넌 지금 뭔가 더 나은 위치에 있거나 마음이 좀 편하지 않을까? 다른 엄마들처럼 해주지 못해서 가끔은 후회가 되기도 하고 미안해져.”
난 도무지 아이 학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나이스’라는 게 있다고만 들었지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아이 성적표도 챙겨본 적 없다. 보여주면 “아이고, 이게 뭔 난수표냐” 하고 고개를 돌렸다. 성적표는 봐서 뭐 한담, 이게 내 생각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고만고만한 아이들끼리라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한데, 사실 내 아이는 2학년 때까지 글을 제대로 못 읽었다. 난독증이었다. 자음과 모음이 합쳐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겨우 터득해도 같은 줄을 반복해서 읽곤 했다.
‘아… 살면서 참 불편하겠구나. 어쩌지’ 싶어 그냥 지켜만 봤다.
일기나 독후감도 그림으로 대신했다. 어려운 한문도 그림이라 여겼는지 잘 따라 그렸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 가서는 어찌나 공부를 못하는지, 성적표를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이가 먼저 말했다.
“엄마, 나 이번 도덕 시험 3점이야.”등등.^^
사람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 그래,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초등 2학년 담임은 환경미화판에 붙일 그림을 내 아이만 완성 못했다고 나를 불렀다. 놀이동산에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기구 하나만 그리라는 과제였는데, 내 아이는 놀이동산 전체를 그리다 보니 채색을 못 하고 있었다. 그 선생은 아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했다. 미친년아!
그 외 몇 번의 일로 아이를 며칠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등교거부.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항변이었고 극단의 선택이었다.
색을 예쁘게 쓴다는 칭찬을 받던 아이는 3학년 때 방과 후 미술 선생님이 바뀌면서 큰 상처를 입었다. 3학년 짜리한테 원뿔을 비롯한 도형을 그리라며 입시 수업을 시킨 것이다. 그 뒤로 내 아이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담임은 이런 말을 했었다.
“얘가 갑자기 성적이 올라서 연대(거기가 끝이에요, 선생님?) 가거나 할 리는 없잖아요. 하지만 공부 잘하고 야비한 애들보다 아드님이 훌륭해요.”
선생이란 사람이 이따위 말뽄새라니.
내게 학원은 탁아소였다. 바쁜 나 대신 아이를 맡기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거기서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 럭키 인거고.
수학 학원 선생님이 내게 밥과 차를 사주며 말했다.
“어머니, 저는 이 아이를 보면 행복해요. ‘너 행복하니?’ 물으면 활짝 웃으면서 ‘네, 행복해요’라고 답해요. 저는 그게 너무 좋아요.”
내게 선물도 보내셨다, 행복한 아이를 키워준 보답이라고 하셨다.
수학은 진짜 못했는데… 내 유전자 맞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공부를 재미있어했다. 공부법을 터득했는지 성적도 쭉쭉 오르고, 영화 동아리 활동도 신나게 했다. 그림도 다시 그렸다. 그리고는 숨겨왔던 장래희망을 꺼냈다. “영화를 하고 싶어. 미술감독이 될 거야”
혼자 힘으로는 여기 까지라며 학원에 보내달라 했고, 부모는 안 들어줄 재간이 없었다. 성적은 상위권으로 뛰었다. 농담 같지만, 얘는 태어나서 성적이 떨어져 본 적이 없다.
학부모 초청 행사엔 아빠만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따로 연락을 주셨다.
“아빠랑 팔짱 끼고, 아빠를 껴안고, 환하게 웃으며 수다 떠는 남학생은 처음 봤어요.”
그렇게 밝았던 아이지만 미대 입시에 낙방했다. 인생 참 쓰다.
선생님들이 다른 길을 권했지만 고집대로만 지원하다 고배를 마셨다. 재수는 못 시킨다고 했지만, 속으론 나도 미안했다. 언제나 말했었다.
“아들, 네 꿈이 고작 대학생은 아니지? 그건 언제든 될 수 있어. 다만 또래 집단에서 소외되는 게 힘든 거지.”
하지만 당사자 마음은 아프고 쓰린 법이다.
결국 원하는 대학은 못 갔지만, 독재(독학재수)의 길로 접어들었고 미술 학원만 다니게 해 달라 했기에 그렇게 했다. 다음 수능에서 성적은 더 올랐다. 그래도 원하는 대학은 낙방, 결국은 그냥저냥 가고 싶지 않던 대학에 입학했지만 아이는 어두워졌다.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학교 그만두고 영화과로 전과 하는 건 어때?” 내가 물었을 때 아들은 떨며 대답했다.
“그래도 돼?”
“왜 안 되겠니. 그렇게 하자.”
그동안 부모님께 죄송해 말도 못 꺼냈다고 했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게 뭐 대수냐. 하고 싶은 걸 해라. 자식 교육을 내게 일임한 남편도 반대하지 않았다.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원비를 마련하고, 3개월 공부해 그렇게 원하던 학교에 들어갔다. 내 입장에선 장하고 기특하다.
막상 연출을 해보니 인간관계가 힘들고, 그렇게 되고 싶던 미술감독이 제일 재미없다고 한다. 군에 가서는 “나 음악 할까?” 묻길래 “에라이, 이놈아!” 했지만, 사실 음악도 잘할 것 같다. 아이의 책상에는 음향 관련 서적이 가득하다.
복학 얘기를 꺼내면 “응” 하고 답하는 걸 보니, 여전히 꿈꾸고 있는 거겠지.
현실 앞에서 쪼그라드는 20대 청년을 보면 마음이 저릿저릿하지만, 나까지 쪼그라질 수는 없지.
“뭐 해 먹고살지?” 글쎄다. 설마 할 일이 없겠니.
계속 꿈꿔라. 꿈은 이루어진다며. 꿈꾸고 기도해라, 아들아.
인생 자동 업그레이드는 학창 시절이 끝나면 함께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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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길어지고 시작과는 조금 빗나갔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다른 엄마들처럼 열정적으로 챙겨주지 못했던 게 가끔은 회한으로 남는다. 그때 조금만 더 닦달했더라면,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억지로 몰아세우지 않았기에 아이가 자기 길을 찾아 헤매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스스로 배우게 된 게 아닐까 싶다.
후회와 안도, 그 두 마음이 늘 함께 따라다니지만… 그게 바로 나다운 ‘엄마의 방식’이었음을 이제는 인정하려 한다.
*사진: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