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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표정이 증언한다

(그림책: 「사랑받는 대통령」)

by 안은주

옛날 동화에서나 있을 법한, 대통령이 등장한다. 자신이 거주할 화려한 성을 짓게 하고 자신에게만 꼭 맞는 맞춤복 수백 벌을 만들게 하며 밤마다 파티를 열고 낮엔 황금마차를 타고 돌아다닌다. 백설공주, 신데렐라에 나오는 왕이나 왕자, 옷을 그토록 좋아하던 벌거벗은 임금님이 그랬던가. 애초에 살던 집이 성이고, 대대로 내려오는 왕의 의복에 백성의 삶을 돌아보려 행차하던 마차가 있었을 것이다. 왕이나 임금이었기에 가능했던 이런 지배의 상징물을 고스란히 계승하다 못해 허영으로 한층 업그레이드 한 대통령은 왕관만 쓰지 않았을 뿐, 왕 또는 황제의 모습 그 이상이다. 그는 황금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는 왕이 된 자신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대통령을 뽑았는데 왕으로 자처하는 행태부터 시작해 국민의 고난시대가 바야흐로 막을 연다.




모니카 페트가 구술한 글과 안토니 보라틴스키가 맞받아치듯 그려낸 그림들이 각각 왼편과 오른편에 위치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 그림책은 아주 어린아이가 읽기에는 내용이 다소 길고, 글이 많다. 그렇다고 못 읽을 것까지는 아닌, 함께 읽을, 혹은 읽어줄 어른이 곁에 있다면 이해가 어렵지는 않은 이야기이다. 어린아이라면 인물표현이 독특하고 선명하게 묘사된 강렬한 색감의 인상적인 그림에 먼저 눈을 두며 얼추 이야기의 전개를 추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화려한 성과 수백 벌의 옷, 황금마차 만들기를 우선시하는 왕의 출현은 그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밖에 없었던 여건과 주변 인물들에 기인한다. 권력에 기생하여 더 큰 부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사람들과 세상천지를 호령할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싶은 사람 간의 이해계산이 맞아떨어지면서 벌어진 결과이다. 왕이 있던 시대에도 존재했던 신하가, 현대에 장관이라는 이름으로 통치자의 곁을 보좌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걸 잘못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용기 버린 비겁자의 무리이다.


탐욕스런 통치자의 행태가 그러하듯 왕놀이에 소요되는 천문학적인 재정은 국민의 고혈로 충당되고 삶이 팍팍해진 사람들이 환영꾼으로 동원되기에는 먹고 사는 일이 급선무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대통령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민심을 괘씸죄로 여기며 어떤 벌로 국민을 괴롭힐까 골몰한다. 권력을 손에 쥔 자가 이상한 논리에 사로잡히게 되면 벌어지는 일이 ‘독재’이다. 그림책 속 대통령은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색깔을 허용하지 않는 ‘색깔 금지’라는 명령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과 기쁨은 오로지 자신만의 전유 감정이라는 궤변으로 국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기에 이른다.


색을 금지한다는 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개성대로 집의 외벽을 칠하고, 취향껏 색색의 옷을 입는 자연스러운 자기표현이 제지되면서 거리는 무채색과 잿빛으로 어둡게 가라앉는다. 자연의 색이 여전히 존재하여 사람들이 기쁨을 찾을 방편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나무와 꽃들마저 뽑히고 잘려 나가기에 이른다. 색을 앗아가고 자연 속 생명을 끊어내는 통치자의 패악을 온전히 감내하려는 국민들이 있을까. 불평불만과 원성이 터져나오는 입에 자물쇠가 채워지고 저항의 의지가 감옥 안에서 꺼져간다. 감시와 통제로 점철되는 시간들이 엄혹한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안 국민의 마음은 통치자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형형색색 보석으로 치장하고 각양각색의 색깔들에 둘러싸인 정원에서 날마다 흥겨운 파티를 벌이는 대통령은 그러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금지’를 호령할 때마다 음습한 그의 동굴 같은 ‘입’ 속으로 수많은 선민이 잡혀 들어간다. 그림 속 쇠창살 안에 갇힌 남자의 얼굴이 절망에 가득 차 있다. 통치자의 ‘금지’ 명령과 국민의 ‘표현’ 자유가 ‘가두는 자’와 ‘갇힌 자’로 상징화되고 대통령의 ‘입’에 채워진 쇠창살로 그려진다. 이 통치자가 어떤 끝을 향해 가고 있는지 독자는 여러 번의 역사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옳지 않고 선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는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 색깔이 사라진 풍경과 우울한 사람들의 표정을 그린 그림에서 아이들은 그 직관적인 감정을 더 예민하게 알아챈다.

그림책 제목과는 정반대로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대통령’에 대한 이 이야기는 어떻게 결말지어질까.


색을 지우고 빼앗고 잘라냈지만, 무지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사람들은 비 온 뒤 하늘에 뜨는 무지개를 기다리며 그 아래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억압된 감정을 마음껏 표출한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기며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금지’라는 명령으로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무지개마저 강권으로 앗아버리려는 기괴한 시도가 결국은 그를 군림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자승자박이 된다. 누구의 힘에 기대어 여태껏 잘 뜰 수 있었는지 분수를 잃어버린 군주는 그 힘으로 되려 뒤엎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군주민수의 민심 풍랑 사례는 세계사에 수도 없이 등장하였다.




이 그림책의 첫머리는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출발한다. 소박한 차림을 하고 소탈한 성격을 가졌으며 다양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통치자이다. 이후 선출된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다시 ‘사랑받는 대통령’이 등장한다. 쫓겨난 자를 대신하여 새롭게 뽑힌 대통령이다. 그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전임자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감옥을 헐어버리는 것이었다. ‘사랑받는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는 통틀어 석 장에 불과하다. 많은 장을 할애하여 잘못된 통치와 억압받는 국민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사랑받는 대통령’이 제목이라니. 훌륭한 통치자를 만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며 만남의 순간도 길지 않다는 의미일까. 그보다는 어리석고 미련한 통치자의 행태를 되짚어, 역으로 행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리라. 어떤 것이 국민을 괴롭히고 자유를 억압하며 행복을 빼앗는 일인지 조목조목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리라. 그리고 국민들에게는 좋은 대통령을 뽑는 일이 얼마나 막중한지 깨닫게 하려는 것이리라.


그림책을 덮고 난 뒤, 다시 처음부터 그림만 찬찬히 훑어본다. 대통령의 행보에 따라 울고 웃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림책 왼쪽 위 끝에 증명사진처럼 등장한다. 국민들은 표정으로 증명한다. 현재 국가원수의 통치 능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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