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0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베짱이가 여름에 노래만 부른 이유

(그림책: 「프레드릭」)

by 안은주 Feb 09. 2025

   15년 전 이 그림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림책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 현장의 교사였던 나는 아이들과 함께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고 와, ‘프레드릭’ 이야기를 먼저 꺼낼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개미와 베짱이’를 교과서로 학습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장래희망으로 교육받은 세대인 나에게 이 그림책은 엇박자도 한참 엇나간 불협화소의 모음처럼 느껴졌다. 애써가며 열심히 안 살아도 되었나... 기분나쁜 질투심이 스멀스멀 차오르까지 했었다.


   더운 여름 열심히 식량을 모으는 개미와 신나게 노래만 부르는 베짱이, 추운 겨울이 오자 개미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따뜻한 집에서 끼니 걱정없이 지내고 집도 음식도 없이 추위에 떨던 베짱이는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개미네 집 문을 두드려 도움을 받는다는 이야기. 교훈 이상의 경고가 담겨 있다. 베짱이 꼴이 되지 않으려면 개미 같은 ‘열심히’ 마인드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공부도 일도 모두 열심히. 우리가 알고 있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이다. 




   「프레드릭」은 ‘개미와 베짱이’의 패러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개미 역할을 하는 네 마리의 들쥐와 베짱이를 연상시키는 프레드릭. 프레드릭은 다른 들쥐들의 핀잔에도 일을 하지 않는다. 무리에서 이탈하여 눈을 감고 있거나 반쯤만 뜬 눈으로 몽상하듯 웅크리고 있다. 열정 가득한 눈으로 힘차게 움직이는 다른 들쥐들에 비해 프레드릭은 게으르고 나태하다. 의욕이 없고 무기력하며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핑계나 대는 대단히 이기적인 구성원이다. 집단의 공동 목표 달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가 둘러대는 핑계는 망상 같기만 하다. 햇살을 모으고, 색깔을 모으고,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니! 


   겨울이 오고 들쥐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칩거한다. 식량을 모으는 데 동조하지 않았다고 내쳐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프레드릭에겐 천만다행이다. 여기서 독자는 ‘개미와 베짱이’의 결말을 따르지 않는 스토리 전개에 프레드릭이 괘씸해지면서도 한편으론 우아하게 감싸 안을 넓은 아량을 가진 자신을 다독이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따라간다. 긴 칩거에 지치고 지루해진 들쥐들. 누군가 프레드릭에게 여름내 모은 프레드릭만의 양식에 대해 묻는다. 반쯤 감겨 항상 졸려 보이던 프레드릭의 눈이 검고 커다란 동공으로 확장되며 또렷하고 총명해진다. 여름날 쏟아지던 햇살과 온갖 색을 품은 자연의 이야기가 프레드릭의 입에서 음악처럼 흘러나오고 들쥐들에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햇살이 주위에 있는 듯 몸이 점점 따뜻해지고, 마음의 눈으로 자연의 선명한 색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프레드릭이 모았던 ‘이야기’는 ‘시’가 되어 들쥐들을 감동시킨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야기의 결말이...




   나의 심기를 건드렸던 화소는 두 부분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 분량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인정받고 존중받은 것. 독자도 동감하는 바이리라.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나요?’, ‘친구들이 일할 때 놀아도 나중에 웃겨주고 이야기만 잘하면 되나요?’ 이런 질문이 날아들 것이 두렵고 적당한 답변을 찾을 수 없어 아이들과 함께 읽기를 주저하였었다. 참... 그림책을 직관적으로 읽던 시기였다. 


   그림책은 함축과 은유의 문학이다. 단순한 어휘와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내어 보이지 않는 문단을 구성해내는 해석력은 독자의 역량이자 재량이다. 작가가 쓰고 그리면서 생각한 의도와 독자의 해석이 맞아떨어지는 소위 ‘정답’의 사고란 있을 수 없다. 과거의 어느 때 들었던 감정이 근래 다시 보았을 때,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읽히는 필자처럼 말이다. 


   들쥐들이 공동체를 표현한 것이라면, 합의된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모두가 같은 업무를 진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들쥐들을 학생의 표현으로 볼 때, 공부를 잘하는 학생(식량을 열심히 모으는 들쥐)뿐만 아니라, 달리기를 잘하거나 음악 혹은 미술을 잘하는 학생(프레드릭)도 충분히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그림책은 개인이 가진 능력과 선호하는 업무 처리 방식의 다양성을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예술의 가치를 들 수 있다. 프레드릭은 예술가이다. 그림책 마지막 장에서 그의 시 낭송에 들쥐들은 ‘넌 시인이야!’라고 인정한다. 식량을 모으는 일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원성이나 비난은 없다. 오히려 그들의 단출한 일상을 풍성하게 해준 프레드릭의 역할을 소중하게 여긴다. 프레드릭으로 인해 들쥐들의 지루한 겨울살이 삶의 질이 상승하였다. 주 5일 근무하고 주말에 영화를 보거나 음악회, 미술관에 가는 우리네의 삶에도 예술은 없어서는 안 될 영역이다. 


   항상 졸면서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 프레드릭의 모습은 우리가 예술가를 오해하는 측면과 닮아있다. 창의성과 표현을 위한 영감을 얻어내는 경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몽상가 정도로 인식되면서 자주 뒷면으로 잊히고 보이지 않는다. 그림책은 단순한 문장이지만 이를 놓치지 않고 언급한다.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 색깔을 모으고 있어.’, ‘기나긴 겨울엔 얘깃거리가 동이 나잖아. 난 지금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 그네들의 역할에도 고됨이 있으며, 다른 차원의 고민과 능력이 요구됨을 이야기한다. 




   베짱이는 왜 그동안 폄하되었는가. 이 그림책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서 슬며시 가여운 마음이 올라온다. 모두가 개미 같은 획일적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냥 무조건 ‘열심히’, ‘훌륭한 사람’이라는 동일한 모드의 동일한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가기만 했다. 이제 베짱이는 유명한 뮤지션이 되었다는 결말로 그의 재능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도 ‘열심히’ 노래를 불렀으므로. 


   국내에 출간된 지 25년을 넘어서는 오래된 그림책이지만 현시점에서 읽어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면서 방심한 사고의 한 축을 흔들어 댄다. 아마 세대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으로 본다. 필자처럼 7, 80년대에 교육받은 세대와 밀레니엄, 그리고 밀레니엄 이후 세대는 분명히 다른 관점일 것이다. 독자는 어느 세대이며 이 그림책이 어떻게 읽히는가.

작가의 이전글 내 목소리를 찾아서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