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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에 대한 감사

(그림책: 「바나나가 더 일찍 오려면」)

by 안은주

도로는 깨끗하고 신호등은 잘 정비되어 있어 이물질을 밟지 않으려 차선을 이탈하거나, 꼬리가 잘리지 않는 교통체증의 늪에 빠질 일이 한결 줄어든다. 누군가의 노고 덕분이다. 점심시간에 들어간 식당에서 계절감이 느껴지는 푸성귀, 생선 등의 식자재로 정갈하게 만든 음식을 먹으며 기운을 얻는다. 누군가의 재배와 어업, 그리고 조리 덕분이다. 컴퓨터로 작업하는 동안 전원이 끊기는 일은 발생하지 않으며, 출력물은 색 번짐 없이 화면과 똑같은 채색으로 출력된다. 전기와 기계를 다루는 누군가의 노고 덕분이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노고로 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간다.



이 그림책 역시 누군가의 노고를 이야기한다. 다음 날 아침으로 먹을 바나나를 주문하는 민주씨. 늦은 밤 주문이 다음 날 배송으로 이어지기까지 매시간 다양한 직군의 일손이 보태진다. 새벽에 문 앞에 도착한 바나나는 그것을 들고 온 배송기사와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땀의 결과일 것이다.


바나나의 새벽 배송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출근을 준비하는 배송기사, 배송차의 운행보다 더 일찍 문을 연 주유소, 주유소의 영업시간보다 더 일찍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주유소 직원, 지하철의 운행에 앞서 더 일찍 일어나 철로를 정비하는 정비사. 바나나 배송을 위해 온 도시가 협업하는 구조처럼 보인다. 그러나 배송기사는 바나나만을 배송하지 않으며, 주유소는 배송차 주유만을 위해 문을 열지 않는다. 정비사가 정비한 철로를 오가는 지하철은 새벽 출근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통근 수단이다. 그러고 보면 민주씨의 바나나는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도시 모든 직업인들의 업무 결과이다.




픽토그램을 닮은, 단순하면서 표현 의도가 명료하게 표현된 그림과 하단에 자리한 큼직한 글이 시원시원하게 읽히며 책장을 넘기는 손에 가속도가 붙는다. 도시 노동자들의 땀이 릴레이로 이어진다. 나의 일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총출동하여 도시의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알차게 채워간다. 착한 사람들의 착한 열정이 그림책 내내 전개된다.


각자 맡은 소임에 충실하자는 도덕교과서 속 사회윤리를 설파하는 것이 이 그림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일까. 너무 쉽게 해석 당해서는 안 된다는 저항이 느껴진다. 그림과 글이 술술 읽힌다고 메시지도 덩달아 수월하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그림책이 이끄는 대로 가볍게 읽어보기로 한다.




“누군가는 새벽밥을 먹고, 음식을 준비하는 식당 주인은 일찍 일어나 장을 보고, 생선가게 주인은 생선을 진열하고, 어부는 바다로 나가 생선을 잡는다.” 누군가의 노동과 그것에 앞선 노동들이 줄줄이 거슬러 올라간다. 문득 생각 하나가 그림책 속 그림과 겹친다. 밥 한 그릇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하며 특히 농부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쌀 한 톨의 밥도 흘리지 않고 먹어야 한다는 어린 시절의 가르침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내 감사함이 그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까. 부모님이 정당한 가격의 돈을 주고 구매한 제품에 왜 감사함의 마음까지 덤으로 얹어야 하는 걸까. 당돌하지만 나름 이유 있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어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으면서 봉투만 받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상사가 크게 꾸짖을 때, 정당한 나의 노동의 대가에까지 감사함을 가져야 한다는 그들의 논리가 어처구니없었다. ‘매사는 당연지사’이므로 ‘매사에 감사하라’는 글귀나 종교의 가르침(나는 비종교인이다)에 무감하며 동의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어린아이와 사회 초년생의 미숙하고 어리숙한 시기를 거쳐 이즈음의 나는 이 도시 어느 지점에서 녹슬지 않은 톱니바퀴의 하나로 아직도 잘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일순간 벼락같이 깨닫는다. 그림책 마지막 장에 다다른 시점이다.


민주씨 집 앞에 배송된 바나나. 민주씨는 새벽 출근을 위해 바나나를 주문했다. 새벽 일터로 출근하는 부모가 일찍 어린이집에 맡긴 아이를 돌보기 위해 민주씨는 그 부모보다 앞서 새벽에 출근해야 한다. 노동의 연결된 고리에 민주씨도 단단히 한몫을 걸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둔탁한 파열음 없이 이탈하지 않으면서 잘 걸쳐져 연결되어 있기에 민주씨도 나도 떨어지지 않고 잘 서 있는 것이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도시의 요청이 지지되고 협력되어 엮인 믿음과 성실의 고리. 노동의 순환 체계이다. 그 속에서 일면식 없지만 우리는 어떤 방식과 형태로든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다. 지금 이 자리가 당연지사가 아닌 감사함의 이유이다.



반전은 없었다. 대신 깨달음이 있었다. 조리하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주문한 배달음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있었을지 그 노동의 고리를 상상해 본다. 내가 지출하는 금액만큼의 정당한 대가라고만 치부하기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그들의 숙련도와 정결한 마음이, 지급되지 않은 빚으로 남는다. 당연한 건 없다. 없는 당연함을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최선의 일군에 감사함은 덤으로 얹을 게 아니다. 나도 독자도 그 감사함의 대우에 합류할 수 있는 일군임에 또 감사하다.


흑백 그림으로 구성된 그림책에서 유난히 노란색이 눈에 띈다. 표지 그림 바나나에서 시작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림 속 어느 하나의 사물에만 노란색이 칠해져 있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 사회에서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림책을 읽으며 노란색 사물을 찾아 그것들의 의미를 연결해 보는 것도 작은 재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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