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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독과 함께 걷는 법

(그림책: 「블랙 독」)

by 안은주

윈스턴 처칠을 평생 따라다닌 검은 개가 있었다. 충직한 반려견이었을까. 검은 개는 전통적으로 서양에서 불길함, 두려움, 죽음을 상징한다. 때문에 용감성을 보이려는 호기가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검은색의 개를 키웠을 것 같진 않다. 군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역사의 순간마다 전면에 등장하는 그가 사실은 평생 우울한 감정과의 대치 속에 살았다면 믿을까. 시시때때로 엄습하는 마음의 감기를 그는 ‘블랙 독’이라고 빗대어 표현하였다.



‘블랙 독’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 없이, 전조증상을 건너뛰고 등장한다. 호프 아저씨가 아침을 먹으며 무심결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처럼. 집 앞엔 살아 있는 진짜 검둥개가 덩실하니 앉아 있다. 별안간 들이닥친 이 방문을 호프 아저씨는 ‘호랑이’만 한 크기의 두려움으로 인식한다. 가족에게 위해를 가할 것으로 생각한 그가 경찰에 신고하지만, 꼼짝 말고 집 안에 있으라는 얘기뿐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경찰관은 실소를 터뜨리며 아저씨의 두려움을 일축하기까지 한다.


다음으로 검둥개를 발견한 호프 아주머니는 ‘코끼리’만 하다고 인식하고, 양치질하던 애들라인은 ‘티라노사우르스’만 하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마음 안에서 두려움은 서로 다른 크기로 그들을 위축시킨다. 그들은 두려움이 집 안으로 전진하여 들어올까 무서워 문을 더욱 단속하고, 행여 나를 찾아 덮칠까 불안하여 불을 끄고 커튼을 닫고 이불 밑에 숨는다.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의 부침이 그림책 속에서 검둥개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두려움은 그렇게 사람들 눈앞에 실체를 드러내고 저마다 지각하는 두려움의 크기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을 염려하는 상상력이 보태어져 점점 부풀어간다. 누구도 이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티라노사우르스만 한 몸집과 힘을 가지지 못해서일까.




놀랍게도 이 집의 가장 어린 꼬맹이가 집 밖으로 나가 보겠다고 한다. 가족들이 우왕좌왕하며 집 안에 대피처를 만들고 눈에 띄지 않게 숨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꼬맹이는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 만나볼 마음을 먹는다. 가족들에게 ‘겁쟁이들’이라고 쏘아붙이고 현관문을 나서는 꼬맹이. “머리를 우적우적 깨물어 먹히고”, “뼈를 아작아작 씹어 먹힐 거”라는 걱정과 경고의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이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꼬맹이와 그 뒤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염탐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비현실적이면서 코믹하다. 가장 어린아이에게 바깥의 상황을 맡기는 꼴이라니!


두려움을 통제하기도 전에 잠식당할 것 같은 더 큰 두려움을 그림책은 “잡아먹히는 것”으로 표현한다. 머리의 뇌 회로가 정지하여 이성적 사고를 할 능력을 잃고,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마음의 몸살을 겪을 것을 지레 염려한다. 피하고 숨어 사라질 두려움이라면 집 밖의 검둥개는 그냥 두어도 괜찮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더군다나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간다면 그림책 속의 꼬맹이처럼 적당한 호기로움이 필요하다. 어려서 두려움이 무언지 모르는 치기일지라도.


검둥개와 마주한 꼬맹이는 그 어마어마한 크기를 확인한다. 그리고 인정한다. “우아, 너 덩치가 진짜 크구나!”라고. 어린아이가 느끼는 두려움의 크기는 성인의 배 이상일 것이다. 꼬맹이 역시 잡아 먹힐 두려움이 먼저 떠오르지만, 그 생각이 몸과 마음을 모두 압도하지 않도록 자신과 검둥개를 향해 천천히 노래를 부른다.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와 봐라. 따라오고 싶으면 덩치를 줄여라.” 노래를 부르며 콩콩 뛰어가는 꼬맹이와 그 뒤를 쫓는 검둥개. 다리 밑과 얼음 위, 놀이기구를 지나쳐 가면서 꼬맹이는 “크기가 작아지지 않으면”, “살을 빼지 않으면” 계속해서 자신을 쫓아 올 수 없을 거라고 노래한다.


공룡처럼 거대한 몸집의 검둥개와 노란 병아리같이 작은 꼬맹이가 한 장면에 그려진 그림은 그야말로 위압적이다. 검둥개의 호흡 한 번에 꼬맹이가 붕 떠서 저만치 날아가 버릴 것 같다. 그러나 우람한 검둥개를 앞에 두고 꼬맹이는 물러섬이 없다. 노란 점처럼 그려진 꼬맹이의 모습이 당차게 보일수록 늘어진 검은 털과 붉은 두 눈의 검둥개가 어쩌면 미련하게 느껴진다.


꼬맹이가 부르는 노래가 주문처럼 검둥개를 홀리며 뛰어가고 뒤쫓는 사이, 그림은 검둥개와 꼬맹이의 크기 비율을 점차 좁혀간다. 꼬맹이가 들과 강을 거치고 놀이터를 지나 다시 집 앞으로 돌아올 때쯤 검둥개는 호랑이도 코끼리도 티라노사우르스도 아닌, 그냥 검둥개만큼의 크기로 작아져 있다. 현관문을 열지 않고 작은 고양이 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간 꼬맹이를 따라 쏙하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림책은 천진난만한 꼬맹이와 두려움의 상징인 검둥개의 경주를 한낮의 놀이처럼 여유롭고 따뜻하게 표현한다. 쫓고 쫓기는 관계이지만 잡아먹겠다는 포악함과 잡아먹힐 불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꼬맹이는 가끔 뒤를 돌아보며 검둥개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기까지 한다. ‘검둥개야 나랑 친해지고 싶니? 그럼, 날 잘 따라와야 해.’라고 말하는 듯하다.


두려움 앞에 용감하고 씩씩하게 대적해서 헤쳐 나가야 한다고 이 그림책을 해석하게 되면, 두려움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남고, 용감하지 못한 자신만 책망하게 된다. 그림책은 두려움을 유인하면서 잘 길들여 크기를 줄여가도록 하는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놀랍도록 잘 표현된 그림으로.


꼬맹이가 검둥개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껴안은 자그마한 그림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그림이 작아 흰 여백이 더욱 두드러지는 이 마지막 장은 커다랗던 두려움이 여백으로 사라져 버리고 대신 친구로 남은 ‘블랙 독’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칠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블랙 독’과 친구가 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고 실천하였다. 그림 그리기와 집필이 ‘블랙 독’의 크기를 줄여주면서, 한편으론 그의 숨겨진 재능을 갈고닦을 수 있도록 하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의 근원이 ‘우울’이었다니, ‘블랙 독’은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영원한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할 수 없다면 까짓것 친구로 만들어 잘 데리고 다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두려움이 나를 덮칠 것 같을 땐, 그림책 속 꼬맹이처럼 말해보는 것이다. ‘나를 따라오고 싶으면 작아져야 해.’라고.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하다 보면 어느새 ‘블랙 독’이 독자의 곁에 반려견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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