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나를 괴롭히는 아이가 있어요」)
여덟 살 때로 기억한다. 하교 전, 전날 내준 숙제를 검사받는 것이 일과의 마무리였다. 선생님은 모든 학생의 공책을 일일이 확인하는 대신 옆자리 친구에게 공책을 보여주고 서로 교차확인을 하도록 했다. 당시 한 반에 6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교사의 숙제 검사도 고된 업무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이들 간의 숙제 확인을 믿어주었던 선생님의 신뢰보다 숙제 안 한 친구를 손들고 말해야 했던 심적 불편함이 더 크게 마음에 어른거렸던 것 같다. 그날도 공책을 교환하고 옆 친구의 숙제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어떤 착오에서인지 내가 두 쪽 정도를 덜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친구의 눈빛은 의혹에 가득 차 있었고, 금방이라도 손을 들어 선생님에게 알릴 태세였다. 내 눈이 어떤 간절함과 절박함으로 호소하고 있었을지 그리고 심장은 얼마나 큰 두들김으로 온몸을 진동시키고 있었을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두근거림이 생생하다. 내 이름을 말할 순간을 놓쳤던 것인지, 애초 말할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친구는 나를 이르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고 고마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나는 '고마워...'라고 말하며 반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숙제도 제대로 안 해 온 아이로 불리지 않은 데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였다.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정확히 그다음 날부터 친구의 군림이 시작되었다. 내 학용품을 마음대로 가져다 쓴다든지, 교실 뒤쪽 휴지통에 버려야 하는 쓰레기들을 멀다는 이유로 내 가방에 모두 집어넣었다. 그런 것들은 참을 수 있었다. 내 비밀,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은 비밀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입막음이라고 치면 되었다. 하지만 수업 도중, 손을 들려는 행동을 보일 때마다 나를 이르려는 것만 같아 심장이 덜컹대고 온몸이 경직되었다. 친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느라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고, 쉬는 시간이면 누군가에게 발설할까 봐 온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2학년을 마무리할 때까지 나는 그렇게 그 아이의 권력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전전긍긍하며 지냈다. 그 아이에게 권력을 쥐여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깟 숙제 몇 장 안 해 온 거, 선생님에게 이실직고하고 약간의 벌을 받으면 끝날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뭐가 더 두려운 것인지 분간이 어려운 나이였다. 그리고 약점을 빌미로 짝꿍을 마음대로 부린 그 아이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이 그림책의 제목을 읽는 순간, 어린 시절 그 아이가 코앞으로 달려와 멈춰 섰다. 지금이라도 당장 손을 들고 '선생님, 얘 숙제 다 안 해 왔어요!'라고 일러바칠 것 같은 얼굴이다. 그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적이 없어서 생김새가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억눌렀던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이 어제 일처럼 훅하고 올라온다.
샤를로트는 자신을 괴롭히는 짝꿍 아녜스가 ‘늑대’ 같다고 생각한다. 날카롭게 솟은 두 귀로 어디든 숨어 있는 샤를로트를 찾아내고 무슨 꺼리든 만들어선 뾰족한 송곳 이빨로 물어뜯기 때문이다. 괴롭힘의 흔적들은 어린 샤를로트의 몸 안에 덩어리를 만든다. 덩어리로 인해 먹고 자고 웃는 일상이 힘에 부치고 몸 어디가 아픈 것처럼 느껴지지만, 검진한 의사는 ‘아주 건강하다.’고 단언한다. 생채기와 불안이 만들어 낸 마음속 덩어리는 나날이 커져가지만,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 아침에 힘겹게 일어나서 가고 싶지 않은 학교에 끌려가다시피 등교하면서도 샤를로트는 부모님에게 말하지 못한다. 창피하고 속상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도 그랬다.
샤를로트가 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지 글은 알려주지 않는다. 괴롭히는 무리와 당하는 아이의 그림을 보면, 체구가 작고 약해 보이며 반격하지 않을 선량한 아이를 몇 아이들이 공격하고 있다. 괴롭히는 아이가 불량한 동작으로 거친 말을 내뱉을 때, 뾰족한 귀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형상이 아이 뒤 그림자로 표현된다. 뒤에 긴 꼬리까지 매달고 있는 영락없는 늑대의 모습이다. 욕을 하고 윽박지르며 함부로 대할수록 아녜스 무리는 더욱 의기양양한 포식자의 모습이 되어간다. 친절하게 잘 놀아주던 아녜스가 태도를 바꾸어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를 샤를로트는 알지 못한다. 이유는 없다. 작은 아이를 괴롭히는 것이 무리에겐 재미있는 놀이일 뿐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정작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했던 것처럼, 샤를로트도 어떤 상황이 더 두려운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괴롭힘을 당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괴롭히는 무리 속에 합류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늑대가 되어 자신과 같은 작은 아이를 괴롭혀야 하는 또 다른 두려움의 시작이다. 마음속 덩어리가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샤를로트는 혼란스럽다.
아녜스 무리는 새로운 먹잇감을 포착한다. 샤를로트처럼 체구가 작고 성실한 얼굴의 아이이다. 이유 없는 악다구니에 위축된 아이를 바라본 순간, 샤를로트는 마음속 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게다가 점점 커지기까지 한다. 주체할 수 없었던 샤를로트는 무리에 동조하여 욕설을 퍼붓는 것으로 힘껏 덩어리를 분출해 낸다. 이제 샤를로트는 늑대가 되어 있다. 그리고 덩어리도 사라지고 없다.
친구의 눈이 의혹으로 가득 찼던 순간, 나는 못 해 온 분량의 숙제를 인정하고 선생님에게 알려지는 두려움을 택했어야 했다. 합당하지 않은 친구의 괴롭힘을 견디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심리적 불안을 겪어야 했던 것보다 훨씬 덜 고통스러우며 정의로운 선택에서 오는 떳떳한 두려움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를로트 또한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때 마음 안에서 꿈틀거리던 덩어리는 늑대가 되려는 폭력성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장면에 대한 의협심과 측은함이었다. 두려움을 해소할 더 좋은 방법을 선택하기에 샤를로트는 너무 어리다. 나 또한 그 시절 너무 어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림책은 샤를로트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내용을 이어간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덩어리가 여전히 몸 안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의 도덕심이자 양심이다. 늑대의 무리에 일갈하고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당당한 모습으로 샤를로트는 새롭게 친구 관계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번엔 ‘진짜’ 덩어리가 사라졌다고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이 동시에 이야기한다.
그림책 속 샤를로트가 나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열심히 마음을 감당해 내는 동안 ‘어린 나’의 마음속에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덩어리’가 조금씩 그려진다.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덩어리가 어느 방향으로 표출되었어야 했을지 ‘어린 나’를 다독이며 가만가만 말 걸어 본다.
벨기에의 임상 심리학자인 아멜리 자보가 자신이 만났던 아이들의 사례를 토대로 쓴 이 그림책을 읽으며 혹시 해소되지 않은 두려움이 있다면 샤를로트를 빌어 그 시절의 나를 위로해 보기 바란다. 아녜스 역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아이이며, 이 아이의 마음을 따라가 보는 것은 그림책을 비판적으로 읽는 과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