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소리지? 듣도 보도 못한 소리가 들려온다. 애들은 조용히 사고를 치지만, 고양이는 다르다. 점잖은 고양이의 사고는 소리를 동반, 이것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필시 루루의 소행이 틀림없다.
레이더를 세워 소리의 근원지로 다가가자, 그녀가 있다. 심심한 루루가 그릇장에 올려둔 애벌레 사냥을 하고 있는 것. 그녀는 지금 일탈 중이다.
캣파이더맨이다!
처음으로 캣파이더맨이 등장했던 날은 루루가 우다다의 흥분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하던 날이었다. 결국 캣타워 맞닿아 있는 커튼을 타고 올라 천장을 찍었더랬다. 그래봤자 제 키(?)의 두 배 정도 높이이지만 제 몸의 무게를 오로지 발톱에 싣고 그것에 의지하여 천장을 향해 오르는 루루의 기이한 행동에 가족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가장 작지만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있는 루루를 보고 감탄하며,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 고양이의 본능도 존중받아야 해.라고 생각했을 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캣파이더맨의 등장으로 집안 공기가 나름 순환되면서 되려 활력이 돌았고, 기이한 루루의 별칭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제 아무리 중성화로 자궁과 난소를 잃었대도 암컷인 것을, 맨보다는 거미고양이의 줄임으로 스파이더냥이 더 좋지 않겠냐, 그래도 입에 촥 붙는 것은 캣파이더맨이지 않느냐며 낄낄낄. 어찌되었든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오르는 루루의 일탈을 우리는 가끔씩 기다린다.점잖은 고양이의 일탈을 말이다.
*과연 고양이의 키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지 조금 고민했다. 사족보행 시의 발끝부터 귀끝까지일까, 이족보행 시 앞발부터 뒷발까지의 길이일까. 고민하다가 몸을 최대한의 길이로 늘려 측정할 수 있는 길이로 문장을 썼다. 뱀의 키도 그런 방식으로 재니까.
오늘은 루루가 그릇장의 철그물망 문을 타고 오른다. 다시 캣파이더맨의 등장. 아아니 스파이더냥인가. 애벌레를 가지고 놀고 싶은가 보다. 집사가 늘어져 있으니, 루루가 집안의 활기를 몰고 올 모양.
한 주 사이에 몰아닥친 대소사의 밀도가 높았던 까닭에 마음이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사다리에서 낙상하신 아빠의 부상과 작고하신 큰엄마의 영정 사진, 제가 선 밟고 사는 줄 모르는 덕에 피로한 간만의 갈등 삼박자가 단단히 합을 이루어 침잠하고 있다. 생각은 많아지고, 또다시 봄이 왔건만 바람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린다.
인생도 찰나인 것을. 그렇기에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살아야지,라는 모범 답안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부질없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 되어 있으니 이게 다 나의 낮은 비열 탓. 고양이야 너의 항상성을 좀 다오...
애벌레, 놓치지 않을 고양.
이것 또한 나름 부지런히 사는 집사의 일탈일까. 모든 감정과 생각들이 말갛게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시간이 필요할 테고, 비열이 낮은 나란 인간은 또 바닥을 치고 금방 회복할 수 있으리. 굳이 애쓰지 않고 그냥 있어보려 한다.
루루의 움직임이 가상하여 내친김에 루루가 좋아하는 레이저를 발사해 준다. 손목만 까딱까딱하여 레이저를 이리저리 쏘아주니, 빨간 점의 움직이는 리듬에 맞추어 우다다 달리다가도 느릿하게, 슬쩍 다가가 두 손으로 빨간 점을 잽싸게 잡는 루루. 슬며-시 손을 떼어 사냥감을 잡았는지 확인하는 루루가 정말 귀엽다. 못 잡았지롱. 각본대로라면 폭풍칭찬과 함께 닭고기 트릿을 획득했을 테지만, 오늘 집사는 일탈 중이니 이해해 다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커튼 꼭대기까지 올라간 순간을 포착하지 못해 아쉽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식구들 배 곯리지 않고 가사노동도 놓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제대로 일탈도 못할 깜냥인가, 나는 기어이 이 하자와 결함들을 떠안고 끙끙 살 팔자인 것인가. 만지면(잘못 건드리면) 무는 삶을 살아야 할 터인데 그러질 못하는 것도 무능이 아닐지 집사는 또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문다. 부질없는 생각들의 도돌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배에 루루를 올려놓고 쓰다듬는다.고양이와 배를 맞대고 앉아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자 루루도 기분이 좋은지 골골골골 골골송 발동이 걸린다. 꼬순 뒤통수 냄새와 따땃한 온기, 낮은 진동의 삼 박자가 큰 위로로 다가오는 순간. 루루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비열이 낮아 다행인 나란 인간, 괜찮고 괜찮을 것이다.
집사 놀아주는 고양이 덕에 조금씩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 고양이의 일탈만큼 집사의 일탈도 무죄를 바라는 집사의 행복을 나눈다. 고양이는 그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