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첫사랑.

평생 아이들을 짝사랑하는 선생님의 숙명,

by 세일러 문

엄마들이 미쳐갈 때쯤 개학을 하고, 선생님들이 미쳐갈 때쯤 방학을 한다던데,

이 표현으로 라면 나는 거의 대부분의 날들을 미쳐 살고 있다.

(학기 중에도, 방학에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엄마 선생님.)


평생 아이들을 짝사랑하는 선생님의 숙명. 그런 선생님의 삶을 택하여 살아온 지 십여 년이다.

또또또 갑작스레 찾아온 성대결절의 복병으로 속삭이는 것도 힘든 요즘, 간신히 목을 쥐어짜 내어 설명을 해줘도 연신 되물으며 키득키득 "선생님 목소리 되게 웃기다." 웃고 있는 여덟 살 아이는 죄가 없다. 이 어린아이에게 못내 서운한 감정이 드는 나 스스로가 유치하기 짝이 없게 느껴질 따름인 오늘,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방학이 필요한 시점이 돌아오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미쳐가는 학기 & 엄마로서 미쳐갈 방학이 서로들 baton touch 준비 중. 동은아, 나 지금 되게 신나~)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밤이 들면서 나의 골짜기에도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아홉 수로 퉁치고 싶었던 불행을, 오늘 다시 서른아홉을 살 운명을 타고났던 이유일까, 올해 유독 힘들게 느껴지는 교실에서 의원면직의 시기를 고민하고 있다. 어디쯤에선 그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내 사랑이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그 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거의 다 왔나 보다....' 열(열의)과 성(정성)을 다했고, 마음을 다 쏟아주어 다됨이 잇닿아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하다. 다만 그 끝을 마주할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며 엔프제는 오늘도 참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데,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는 교실에서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내려 첫 마음을 찾아본다.



사랑하는 4반,
언젠가 선생님 해줬던 [겁]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니? 선생님과 제자는 만 겁의 인연이라고 하더라.
내 녀석들, 우리가 함께 보내온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인연으로 하여금 허락된 것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까?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이런 귀한 인연이 닿아 서른네 명의 개구쟁이들과 이렇게 매일 아침 인사를 하고 공부를 하고 밥을 먹으며 그렇게 지낼 수 있을까? 그런 날이 또 있을까? :)

열 달이라는 약속된 시간이 정말 너무도 빨리 흘러간 것 같구나. 마지막 하루를 남겨둔 지금, 빈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함께 보내온 시간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그렇게 뇌리를 스쳐간다.
하루하루가 신나고 즐거웠고, 가끔은 힘든 날도 있었지만 밝고 맑은 너희를 보면 힘이 마구마구 솟았던 것 같아. 그렇게 보내온 시간 동안 너희가 선생님 가슴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았는지,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 또 뿌듯한 마음, 아쉬운 마음, 그런 마음들이 가득가득하다. 선생님이 될 준비를 하면서 늘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기다려지고 기대하게 되었단다. 우리 4반은 늘 그 기대 이상으로 선생님을 놀라게 했지. 너희들을 만나면서 선생님이 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단다. 선생님들은 평생 아이들을 짝사랑한다던데, 무엇보다 선생님에겐 너희가 첫 제자라 더 특별하고 소중하게 기억될 것 같구나.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가 있었고,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것을 잘 알았기에 더 행복한 날들이었던 것 같아.
선생님은 우리가 좀 더 의미 있고 진실된 삶을 살도록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노력하자 했는데 그런 것들이 너희에게 잘 전해졌는지 모르겠구나.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해 노력하렴. 너희의 모습을 선생님이 늘 지켜볼 거란다. 언제 어디서 마주치더라도 부끄럽지 않고 마냥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할 수 있게 열심히 지내자.

기쁘게 너희를 3학년으로 올려 보내련다. 이것이 정녕 우리의 마지막은 아닐 터이고,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한 우리는 늘 함께 있는 것일 테니까. :)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내 녀석들.




교단에 처음 섰던 그해, 나의 첫사랑 아홉 살 녀석들은 그봄 새로이 돋아난 여리여리하고 푸르른 새 잎 같았다. 싱그럽고, 푸르르고, 가까이 보면 솜털이 보송보송한 녀석들이 얼굴들이 잘밤에 누워서도 방울방울 떠올라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순진무구함에 매일매일이 기적 같던 그 시절, 아이들의 티 없는 순진함을 어떻게 해서라도 지켜주고 싶었던, 어느 시간- 어딜 가도 주머니에 아이들을 넣어 다니고 싶었던, 늦잠으로 지각한 용용이를 화장실에 데려가 세수시켜주고 새집 지어진 머리를 단정히 매만져주던, 심부름을 갔다가 달려와 와락 안기는 아이의 콩닥이는 심장에 감동했던, 아이들과의 마지막 날 칠판 가득 연애편지를 써두고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터져 버린 울음에 다 번진 마스카라에 눈물 콧물 범벅으로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했던 그 시절.


다시 불혹을 앞둔 지금,

선생님이 되어 가졌던 그 첫 마음들을 잊지 않으려 가끔 그날들을 꺼내어 본다.





우리 건이는 글씨를 참 잘 쓰는구나. 석봉님이 울고 가실 것 같아.



경건한 건이는 또박또박 정자체로 정성을 다해 글씨를 썼다. 혼자만의 경연을 하듯 혼신의 힘을 다해 글씨를 쓰는 모습이 별안간 귀여워 자꾸 눈길이 갔다. 선생님의 칭찬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활동을 막론하고 항상 정성 담은 글씨를 써오는 아이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작은 손으로 힘을 꽉 쥐고 익숙치 않은 문장들을 정성껏 꾹꾹 눌러써 내려가는 손은 빨개져서 아플 법도 한데, 묵묵히 두 눈을 반짝이며 집중한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녕 아이들은 칭찬을 먹고 자라는 것인가. 쑥스러움 많고 소극적이라 생각했던 건이는 석봉님이 울고 가실 글씨 칭찬을 먹고 날로 날로 자라났다. 잘 웃고, 열심히 생활하며 스스로 손을 들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그러던 어느 날엔가 건이는 장담비가 되어 손담비 뺨치는 요염하고 색시한 춤을 모두 앞에서 즐길 수 있을 만큼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내었다.


만약에 김반장이 없었더라면, 무슨 재미로 학교 다닐까, 해가 떠 김반장, 달이 떠도 김반장, 김반장이 최고야.


우리 반 최고의 개구쟁이 희야와의 갈등에 속이 많이 상했을 텐데, 어떠한 말도 내놓지 않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는 아이. 자기 억울한 부분을 1도 얘기하지 않고,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그저 잘하겠다 말하는 아홉 살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김반장은 가진 능력치가 어마무시한 데다가, 지-덕-체를 고루 겸비해 완성형에 가까운 보물 1호로 그중에서도 건강한 마음밭이 가장 빛나던 아이였다. 아이들과 즐겁게 잘 어울리면서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반을 이상적으로 이끌어갔고, 자기 할 것을 잘 챙기면서도 친구들을 위한 희생을 마다 않았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적당한 유머까지 갖추었으며, 잘 해내고자 하는 승부욕도 남다른데 다른 친구들을 재촉하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갖추었다니. 이 사기캐스러운 아이를 만난 것은 정말 교직생활에 쉬이 오지 않을 큰 행운이었다. 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었고 더 좋은 선생님이 되어 주고 싶어, 봇짐장수 못지않은 자료들을 분신처럼 이고 지고 다니게 했던 장본인. 김반장, 선생님은 여전히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너를 응원하고 있어.

어머 우리 철이 드디어 멋진 앞니를 갖게 되었구나, 축하해. ^^


학교가 뭐가 그리 좋은 지, 하교를 하고서도 오며 가며 교실에 들러 "선생님~" 인사를 하고 가던 녀석. 위아래로 유치가 한꺼번에 몽땅 6개나 빠져 음식을 어찌 잘라먹는지 점심시간이면 더 마음이 쓰였었고, 두 계절이 지나도록 영구치가 자랄 기미가 보이질 않아 새 이를 가져다주지 않는 이빨 요정님이 야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철이는 어머님이 누구신지 잘 빚어 낳아 놓으신 귀공자스타일의 인기남.) 웃을 때 말갛게 개인 하늘의 눈부심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가졌던 그 아이의 웃음 안에, 우주의 블랙홀처럼 시선을 빨아들이는 빠진 유치 공간들은 모순적이게도 귀여움을 배가시켰었다. 너의 눈, 코, 입(feat. 태양)얼굴 구석구석에 귀여움을 장착한 철이 앞에서는 엄하고 진지한 선생님이 되어야 하는 순간이 참을 수도, 숨길 수도 없는 기침과 방귀처럼 새어 나오는 웃음 때문에 괴로웠다. 슬프고 아픈 생각들 몇 개 정도를 돌려 쓰며 참으려 애를 썼지만, 자꾸만 새어 나와 근엄한 표정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황급히 뒤돌아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건이의 앞니는 우리 반 초미의 관심사였으니 오돌토돌 작은 이가 솟아 오르기 시작했을 땐 반 아이들 모두 흥분의 도가니였고, 대문짝만 한 앞니가 자리를 잡았을 땐 축하와 안도와 함께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제 우리 철이는 더 자라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구나,하고.)




선생님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 세랴 이야기를 들을 때 더 빛났던 눈동자, 심심한 선생님의 유머에도 발을 동동 구르며 꺄르르 웃던 서른네 명의 보물들, 첫 발령 스물네 살 선생님의 실수도 덮어주고 위로해 줬던 너그러움,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인내와 따뜻함이 교실 여기저기에서 샘솟던 일상,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었지만 신나고 즐거웠던 나날들, 잊을 수가 없는 선생님의 첫사랑이었다.

이 아이들을 나에게 보내주신 아이들의 부모님들 마저도 완벽한 2007년이었다.(feat. 담임의 교육철학을 믿고 존중해 주시며 두어 주셨던 적당한 거리와 따뜻한 지지)



이제는 스물다섯이 되었을 나의 첫사랑들,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귀하고 소중한 서로의 인연들과 감사한 날들을 살아가고 있기를 기도해 본다. 그리고 지금 잠시 첫사랑에 허덕였지만, 내일 아침이 밝아오면 우리 아이들을 향한 짝사랑을 실천하겠다 다짐해 본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선생님으로서 사는 날 동안은 겸허히 선생님의 숙명을 받아들이련다.


안녕, 나의 첫사랑.

선생님의 짝사랑은 -ing




+)


지난겨울, 간절한 마음으로 두드렸던 브런치의 문은 개학과 함께 열리지 못하고 있으니,

하려 했던 백만 개의 말들은 백만 송이 장미가 되어 송이송이 알알이 내 안에 박혀버렸네요.

(브런치의 글 발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일상이지만, 하이클래스 알림장과 주간학습안내 발행은 주 1회 성실히 잊지 않고 있다는요...사라지기도 하고, 누군가의 마음에서는 한 톨의 씨앗이 되기도 했을,,,글이라 칭하기엔 다소 부끄러운 안내랄까요...)


할 일은 너무나 많고, 아직 포기하지 못한 것들도 많은 데다가, 인지나 체력이 예전만 하지 못한 이유로 그저 현생이 너무 고달픕니다.


의지의 부족인가, 여력이 없는 것인가. 왜 내 글을 출산 못하고 있는지....말의 힘과 글의 힘을 믿는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고 한 것들이, 왜 자꾸만 자기 검열의 벽을 높이는지..


감사한 글동무님 희준님의 커피 선물 다짐을 지켜내려, 이러다간 우주의 작은 티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생겨서 일상이 글이 되는 경험을 다시 시작할 트리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찌끄려봤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권선징악과 사필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