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의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시집오면서 혼수로 해온, 결혼 13년의 세월 동안 7번의 이사를 함께 하면서도 잘 버텨주던 고마운 삼성 양문형 냉장고다. 출장서비스도 예약하고 꼬박 하루가 걸려 받을 수 있었는데 기어이 오늘 아침 냉장고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연말로 예정되어 있는 입주를 앞두고 불안 불안했던 터였다. 십여 년의 세월을 버텨준 고마운 혼수품들이 조금씩 이상징조를 보이고 있다. 에어컨과 세탁기 등 거대 가전을 비롯하여 이미 제 운명을 다해 보내준 친구들이 슬프게도 꽤 있었고, 흘러가는 세월 속에 여전한 것은 남편과 나, 그리고 우직한 냉장고뿐이라며, '냉장고가 부디 무탈하기를...' 냉장고의 건강을 간간이 빌어왔다.
엊그제 저녁, "냉장고가 왜 안 시원한 것 같지?" 남편이 물어오기 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기민한 편으로 항시 편치 않은 인생길을 자초하는 나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구나,,, 놀란 마음에 황급히 냉장고를 열어 내용물을 살폈을 땐 이미 냉장고의 이상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돼지바는 돼지쥬스가 되어 있었고, 쌍쌍바는 초코우유가 될 정도로 냉장고가 냉기를 잃었다... 문이 열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부디 무사만 해다오. 냉장고야, 힘내. 불길한 기운을 모르는 척하며 부지런히 냉장고를 파먹었다.
이천 오백의 백혈구, 파워 J의 다음 스텝, 아픈 해피로 요약될 수 있는 168시간. 그러니까 지나온 일주일은 그야말로 전쟁통이었다는 말이다. 주치의 양반도 괜찮을 거다 걱정하지 말라 말해주었지만 현저히 낮은 백혈구 수치에 당황한 기색은 역력했다. 널뛰는 감정 속에서도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고민하며 담담하게 정밀혈액검사결과를 기다렸다. 다음 주 앙상블 위켄을 두고 혹여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공연일까 싶어 컨디션 난조에도 불구하고 매일 한 시간씩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그동안은 퍽 아름답고 감사한 날들이었으니, 불운이 나를 비껴가지 않더라도 담대히 운명을 받아들이려 마음을 다스렸다.
지난한 속끓임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은 참으로 더디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과정을 준비해야 마음이 편안한 파워 J의 계획형 인간으로 시간이 더디 가는 만큼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어갔다.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외워도 전혀 괜찮지가 않은 매직-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듯한 급속 노화를 일주일 사이 경험하고, 다행스레 형태학적인 문제가 없어 추이 관찰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결말을 맞았다. 검사결과를 듣고 마음 졸이고 계실 엄마와 통화를 하며 해피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는 소식에 어쩐지 괜찮은 내가 미안했다.
삶은 어떻게 이렇게 극적인지, 다시 삶을 선물 받은 것 같은 나와 달리 우리 집 냉장고는 운명하셨다. 급하게 이사 전까지 쓸 냉장고를 구매하고 돌아와 내용물 정리를 하며 고마운 마음을 담아 고생한 냉장고 구석구석을 닦는다. 13년 동안 성실하게 우리 곁을 차갑게 지켜준 냉장고와의 추억은 덤이고, 가는 김에 부디 우리 해피 아픈 것도 다 지고 가길 바란다는 무거운 부탁 또한 잊지 않는다. 너의 몫까지 해피와 잘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하며 냉장고의 영면을 기도한다. 그리고 염치불고하고 나와 해피의 만수무강도 기도해본다.
*주간루루 연재는 쉬어 갑니다. :D 여름털코트를 장만한 근황을 살짝 스포하며 다음 주 성실발행도 다짐합니다. 부디 이 여름, 모두 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