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Wild, 또는 갈팡질팡하는 문학에로의 길
직장에서 하반기 희망 도서 신청을 받았던 게 기억이 나서 다시 들어가봤다. 하단에 주르륵 한강 작가님의 이름이 보였다. 출간작 전권이 일목요연하게 나열된 것으로 보아, 노벨문학상 소식이 있고나서 담당자가 급하게 추가한 모양이었다. 아마 단번에 전권을 다 구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어찌됐건 나는 당분간 못 읽겠구나 하고 단념했다.
버스를 탔는데 중년의 남성이 책을 펼친 채 들고 있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열심히 독서를 이어갔다. 표지를 보아하니 『소년이 온다』 같았다. 나는 내심 놀랐다. 왜냐하면 보통 대중교통 안에서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근방 10미터 이내로)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나조차도 덜컹거리는 버스에서는 활자를 읽을 엄두를 못 내기 때문에. 아무튼 오랜만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책 읽는 사람들을 맞닥뜨리고 있다.
올여름에 일하기가 싫어 상담을 받으러 다녔었다. 매너리즘이 심해 그야말로 나사가 하나 풀린 기분으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언젠가 따로 다루기로 하고… 여차저차 진행하는 와중에 상담사가 나한테 왜 문학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문학은 학문의 영역이에요. 노벨문학상이 있잖아요.”
솔직히 정확하게 뭐라 했었는지는 기억 안 난다. (내가 늘 그렇지, 뭐.) 그러나 굳이 ‘노벨문학상’이라는 권위를 빌려가며 설파했던 기억은 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문학은 역사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높은 수준의 인류적 성취이고, 인생을 소진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때는 그 말이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보라지! 하! 문학은 인생을 바꾼다니깐! (금전이나 명예 같은, 지극히 세속적인 의미로다가…)
사실 나는 반쪽짜리 문학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 작가 사후 삼십 년이 지나지 않은 작품은 읽지 않는다는 인물이 나오는데 내가 딱 그렇다. 현대작가들을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고, 집어들고보니 고인(故人)이었다… 라고 말하면 너무 변명 같을까? (아마도)에리히 캐스트너의 ‘좋은 책과 덜 좋은 책은 시간이 알려준다.’*라는 말이 문학에 관한 한 가장 진실이라 믿고 있기 때문에 내 독서 편식은 앞으로도 크게 변할 것 같지는 않다.
다른 예술과 비슷하게, 글의 길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당하는 것에 가깝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Call of the Wild’(야생의 부름**)에 비유한다. 본능이 이끄는 길, 그러나 따라가는 순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길이다. 그곳에서 구원을 얻을 수도 있지만 만신창이가 되어 온 길을 되짚어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남은 것은 정말로 소진된 젊은 날과 좌절이 남긴 깊은 주름 뿐. 출발할 때는 누구나 청운의 꿈을 품고 나선다.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아직 꿈을 꾸고 있는 정도다. 출근길 버스에서 늑대가 우는 소리를 듣지만 고개를 젓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진짜 늑대라면 진작에 사람들이 알아봤어야 했다. 내게는 시간과 지극히 세속적인 요소들을 ‘꼬라박아도’ 괜찮은 안전망이 없다.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이, 카프카가 평생 생업을 유지하면서 작품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된다. 아니 근데 나는 불행하게 죽기는 싫은데. 내가 읽는 책을 쓴 고인들은 어쩐지 다들 좀 불행했던 것 같다. 이런, 문학의 신은 행복한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는가.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콜 오브더 와일드를 한평생 실행하고 있는 사람이 한국에 있어서, 그리고 그 몸부림을 인정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번 노벨문학상에 대한 내 감상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또 다양한 의미가 있겠지마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고나서 남아 있는 것이 진실 아니겠는가.
본래 이 글은 여기까지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금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다. 문학에의 길을 이렇게 모 아니면 도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의문이 생겼다. 왜 인생을 저당 잡혀야 이룰 수 있는 경지처럼 느끼는 것일까? 인생을 전부 바쳐야만 문학을 할 수 있나? 인생의 일부만, 뭐 사 분의 일 정도만 투자해서 행복하게 놀다 가면 안 되는 것일까? 문학과 삶의 산뜻한 접점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글이 또 줄줄이 늘어난다. 그러니 일단은 버스나 지하철에 ’독서 동지‘가 생겨서 만족스럽다는 말로 끝맺는 것이 좋겠다.
이만 총총.(?)
* ‘좋은 책과 덜 좋은 책은 시간이 알려준다.’: 정확한 인용구 아님!
**야생의 부름: 한국어 번역은 뭔가 어색하다
***아 참, 하루키는 살아 계십니다. 경향성이 그렇다는 정도로만 이해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