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남동생은 대학 입학 전 용돈을 모은다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주방 보조 일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때 남동생은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보다 세 살 많은데 엄청 귀여워" 그렇게 남동생의 스무 살부터 스물아홉까지, 긴 연애가 시작됐다.
우리 가족은 남동생의 전 여자친구를 참 귀하게 여겼다. 우리 집 일에 손이 필요하면 어디서든 달려와 도왔고, 남동생이 군대에 있을 때는 그 빈자리를 메우려 부모님을 살뜰히 챙기는 아이였다.
둘은 여자친구가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하고 싶다며 어느 날 갑자기 결혼식장 예약을 해왔다. 남동생은 부모님께 집을 마련해 달라 요구했고, 부모님은 '우리 아들 기죽이면 안 된다'며 빚을 내어 집을 장만해 주셨다. 그리고 둘은 그곳에서 결혼 전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자친구는 본인 가족에게 동거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집안이 엄해서 말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굳이 묻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었던 것이다. 남동생은 가끔 여자친구 부모님이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간호사 일을 하는 남동생이 못마땅하다는 이유였다. 눈 밖에 난 동생은 인정을 받기 위해 참 애썼다고 나중에 내게 말했다.
어느 날, 여자친구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여자친구 집에 현금이 없다며 부모님께 장례비와 병원비를 빌려달라 부탁했다. 부모님은 급하다 하니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보태주셨다.
남동생은 주말마다 여자친구 아버님 댁에 가서 청소를 하고, 여자친구 남동생을 챙기고, 아버님과 함께 등산도 다녔다고 했다. 그즈음 남동생도 이제는 인정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여자친구 가족들과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여자친구 아버지가 "어디 감히 간호사 주제에 공무원을 만나려고 하냐"며 식사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도 두 사람은 1년 정도 더 만남을 이어갔다. 남동생은 그 시간들이 자신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고 했다. 1년 전, 식당 한가운데 앉아 울고 있는 자신을 두고, 아무 말 없이 아버지 팔짱을 끼고 자리를 떠나던 여자친구의 뒷모습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그 장면이 자꾸 떠올라 결국 이 관계는 자신을 병들게 할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남동생의 9년 연애는 그렇게 끝이 났다. 많이 아팠지만 결국 지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 여자친구는 평소에도 씀씀이가 꽤 큰 사람이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기분이 좋으면 "오늘은 내가 쏜다"며 골든벨을 울리곤 했던, 그런 호탕한 친구였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 가족은 '뭐 자기 기분인데 어쩌겠냐'며 웃어넘겼고, 남동생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두 사람이 헤어진 후, 남동생 집으로 여자친구 명의의 대출 독촉장들이 하나둘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그동안 자기 가족 집으로 우편이 가는 걸 막기 위해 남동생 집 주소를 써놓았던 것이다. 동거할 때는 미리 우편을 수거해 남동생이 보지 못하게 했지만, 헤어진 후에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면서 비로소 드러난 모습이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 댁까지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처음엔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줄 알고 반가운 마음으로 맞았지만, 이내 돈 이야기를 꺼내는 그 친구를 보며 '내가 9년 동안 알던 애가 맞나' 싶어 마음이 참 복잡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 모두가 뭔가에 홀린 듯 그 친구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작은 것들이 이제야 하나둘 또렷하게 보였다. 지나고 나서야만 알게 되는 게 있는 것 같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랑했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