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 오도 가도 못하는 마음
아침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남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아빠가 입원해 있는데 병실 안에서 담배를 피워서 쫓겨날 뻔했고 본인이 아주 난처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남동생도 간호대를 졸업해 지금 간호사를 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옛날 생각이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빠는 할머니에게 담배를 배웠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부터 담배를 시작했으니 올해 1959년생인 아빠는 50년을 담배와 함께 했다고 볼 수 있다. 나와 지낸 시간보다 담배와 15년을 더 함께한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 담배가 더 애틋한 것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태어났을 때 다리가 안쪽으로 휘어져 나와 깁스를 해야 했고 2살이 막 지날 때쯤 감기에서 늑막염으로 번져 폐에 고름을 빼느라 호스를 꽂은 채로 지내야 했다. 4살쯤은 다리 허리 등 쪽 (당시 몸에 3분의 2에 해당)에 화상을 입기도 했고 9살 때는 음주 운전 차량에 교통사고가 나기도 했다. 내 인생은 어렸을 때부터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이 아픈 내 앞에서도 아빠는 담배를 참지 못하고 집안에서 그냥 피셨다. 옛날엔 다 그랬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분들도 있으셨다.
전편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들어갈 당시 연합고사라는 시험을 치러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곤 했다. 그 당시 우리 친가 쪽엔 아직 인문계에 들어간 사람은 없었다. 사랑과 인정에 고팠던 나는 그 인정을 위해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내가 선언하듯 가족들에게 말했다. "내가 해 보일 테니 내가 만약 인문계에 가게 된다면 아빠는 담배를 끊고, 나 최신 핸드폰도 사줘!". 내가 이제껏 둘째로서 원한걸 갖은 적이 없기에 꼭 이루어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관심과 내가 원하는 핸드폰까지 가져보고 싶었다. 그렇게 늦게 시작한 공부로 1년간의 노력 후 원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이루었지만 두 개 중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었다. 아빠의 금연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엄마는 집안 사정이 어려우니 제일 저렴한 핸드폰을 이모를 통해 구입하자고 했다. 나는 아직도 후회한다. 당시 동생과 언니는 가지고 싶은 물건은 어떻게 해서든 가졌는데 나는 항상 알겠다며 양보하고 참아냈다. 그게 아직까지 생각나는 거 보면 그때 그냥 여느 사춘기 아이처럼 떼를 부려볼 것 그랬나 보다. 그때 참았더니 지금까지 나는 뭐든 잘 참아내고 안 좋은 걸 줘도 괜찮은 아이로 부모님은 알고 있다. 남동생은 집이 작아 혹여 불편할까 노심초사지만 공부한다며 서울에 올라간 나는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했던 언니도 원룸을 구해줬는데 말이다. 나도 좀 해주라고 울고 불고 떼를 써봤다면 이 사랑받지 못했단 공허함이 그럼 없었으려나? 사랑받았다고 생각이 들었으려나?
다시 금연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 가족 중에 아빠, 언니, 남동생 이렇게 흡연을 한다. 그리고 아빠는 고혈압과 심장, 췌장질환 언니도 고혈압이 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알면서도 모두에게 금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약속을 하지도 않지만 지키지 않아도 별 마음을 안 쓰기로 했다. 나름 몇 번을 믿고 기다렸는데 또 지켜지지 않으니까 그 실망이 누적이 되어 경계선이 생겨 버렸다.
그리고 알아 버렸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를 지키기 위해선 나만의 건강한 경계선을 그어두고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다독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 말이다. 나에게 말해준다 '화가 난 나도 서운한 나도 다 괜찮아 나 무척 잘살고 있어' 라며 내가 그은 건강한 경계선 안에서 조각난 눈뭉치를 다시 쓸어 담아 둥글게 만들어 나를 다독여 준다.
요즘 문득 든 생각은 내가 바라는 건 사실 금연이 아니라 나를 위한 배려와 약속의 존중이었던 거 같다. 나는 더 이상 그 실망의 고리에 휘말리지 않도록 감정의 주도권을 나에게 되찾아 오는 것을 연습 중이다. 그리고 언제 들어닥칠 지 모르는 상처로부터 나를 잘 보호하는 것 그게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나를 위한 선택이라는 것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