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가장 큰 복이다.
임신 11주가 되어가지만, 가족들은 나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는다. 몸은 괜찮은지, 어떻게 지내는지 묻는 말조차 없다.
법륜 스님은 “사는 게 을이 되지 말고 갑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연락을 받고 싶다면 기다리며 속으로 삭이지 말고, 그저 원할 때 먼저 연락하면 된다는 것이다. 기다리며 꽁해 있는 건 스스로를 ‘을’의 위치에 두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어떤 관계에서든 내가 원하면 먼저 연락하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언니에게 오랜만에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잘 지내, 근데 네가 연락 좀 자주 해라”라는 핀잔이었다. 언니 역시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먼저 손 내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가족 사이에도 이렇게 사소한 ‘연락의 기싸움’이 있다는 게 씁쓸하다. 누구 하나 넓은 마음으로 먼저 다가와 주는 어른이 없는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점점 연락을 줄이게 되었다. 오히려 연락을 하지 않는 편이 마음이 더 편해졌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고, 그리움도 예전 같지 않다. 예전에는 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 바로 전화하거나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글로 풀어낸다. 일기를 쓰거나 이렇게 인터넷에 마음을 적다 보면 어느새 다시 고요해지고, 바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일도 멈췄다. 내 이야기를 해도 공감은커녕 결국엔 나의 단점으로 돌아와 그들의 무기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20살 무렵, 친구와 다투고 부모님께 털어놓았을 때도 그랬다. “아직도 그 일로 힘들어하냐, 사춘기냐”라는 말과 함께, 내 뒤에서는 “얘는 친구도 잘 못 사귀는 애다”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속마음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며, 나는 인간관계 전반에 깊은 불신과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조차 내 인생의 큰 숙제로 남아 있다. 나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의 진실을 나누지 않는 존재들 그것이 지금의 내게 가족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다른 인간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랫동안 부모복이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다. 본인 스스로를 확실히 믿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진짜 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결국 나 자신이다. 내가 나를 믿고,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강한 인정과 사랑은 없다.
심리학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자식은 부모의 부모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되어서도 안 된다.” 부모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 부모 역시 자기 인생에서 한 번은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상담 선생님이 해준 말도 마음에 남아 있다.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책임지려 하지 마세요. 당신의 행복만 책임지는 것도 이미 벅찬 세상살이잖아요.”
그 말처럼 이제 나는 조금씩 내려놓으려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던 기대와 상처를. 그리고 내 행복을 내가 책임지는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