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련된 딸에서 벗어나며

나를 소모하지 않기로 했다

by B 비

나는 남편과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소 건강한 가족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남편은 매주 토요일에는 본인 어머니, 일요일에는 아버지와 전화를 한다. 전화를 마칠 때면 늘 “사랑해요”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고, 시부모님도 그런 남편을 따뜻하게 챙기셨다. 효도는 각자 알아서 하면 된다며, 서로의 부모님과의 연락에 대해 전혀 부담을 주지 않은 것도 남편이었다.


그 모습은 내게 낯설었다.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가족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시부모님은 본인들의 삶을 잘 가꾸면서도 우리를 함께 챙겨 주셨다. 해외에서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우리 생일마다 어떻게든 찾아와 축하해 주고 싶어 했고, 늘 우리를 그리워해 주셨다.


그에 비해 나의 부모님은 달랐다. 우리가 비행기 티켓을 준비하고 여행 일정을 짜야만 겨우 우리를 보러 오셨다. 한국에 들어갔을 때도 우리가 모든 음식을 사고 예약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가족끼리만 저녁을 먹고 싶어도, 부모님은 꼭 친척들을 불러 모았다. “한국에 들어왔으니 어른들께 인사드려야지”라는 이유였다.


나는 언니와 동생에게 물었다. “친척들께 서로 자주 인사가? 설날이나 추석에 자주 모여?”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아니”였다. 결국 부모님이 말하는 ‘자식의 도리’는 오직 내 몫이었다.


돌아보면 이유를 안다. 부모님의 사랑과 인정을 갈망했던 내가 스스로 이제껏 맞추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니어도 맞는 척, 늘 원하는 대답을 해드렸다. 그렇게 나는 조련되어 갔고, 부모님에게는 쉽게 다룰 수 있는, 아프지 않은 손가락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결국 그 손가락이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부모님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을 한다. 부모님이 늘 하던 앓는 소리도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한다. 예전 같으면 “돈이 없다, 100만 원만 붙여라”라는 말에 선뜻 송금하고, 더 도와야 하나 자책하며 주말마다 일을 거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저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긴다.


부모님은 돈을 받는 것을 자식에게 받는 사랑이라 믿는 듯하다. 오랫동안 나만이 그 사랑고픔을 채워드렸고, 언니와 동생은 애초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니 굳이 앓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를 내려놓으니 이제는 언니나 동생이 그 몫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혼자서 억지로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15년 동안 내가 감당했으니, 이제는 다른 이들이 제 역할을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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