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쌓이는 기쁨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너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 중인 채소들을 보면 신경이 쓰이는 것들이 몇 있다.
얼마 안 되는 화분에서 키우는 채소이지만, 나름 '화분텃밭'의 주인이기에 마트 진열대에 올라와 있는 채소들을 키워낸 농부의 손길과 정성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을지 조금이나마 공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배추와 양배추는 화분에서 키워낼 때에도 주인의 손을 가장 많이 타는 채소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속이 꽉 찬 튼실한 배추를 연중 3천 원가량의 가격으로 판매 중인데, 그것을 키워 내어 유통 업자에게 넘기기까지 농부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마음을 졸이는 나날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애증의 채소
전문 농사꾼도 아닌 나는 기존에 배추를 재배해 본 적도 없고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한 번 키워볼까?' 하는 마음으로 심었던 배추였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화분에서 배추를 키워 소소하게 찬거리로 활용한 지 4년 차.
그 시간 동안 가장 많이 뱉었던 말은 "이게 되네?"였다.
구충을 하고 물과 일조량을 챙기는 것이 너무나 고된 날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는 배추를 사 먹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수고를 모두 이겨내고 직접 키운 배추를 한 입 베어 물면,
"역시 키워먹기를 잘했네."싶은 양가적인 감정이 차오르는 애증의 채소, 배추.
연중 일정한 기후를 가진 나라에 살고 있는 덕택으로 식물 키우기에는 나무랄 것 없는 날씨이지만, 서늘한 온도를 좋아하는 배추의 경우 이 나라의 환경이 100% 만족스러울 리 없다.
하루 종일 내리쬐는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자리에 배추 화분을 두고 인위적으로 선선한 온도를 만들어 준다.
추운 날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배추 겉잎을 묶어주는 한파 대비의 수고는 불필요하다.
덕분에 안쪽부터 차오르는 어린 배춧잎들도 넉넉한 햇살을 맞으며 자라나기 때문에 내가 키우는 배추는 속 안쪽까지 초록빛이 만연하다.
자급자족으로 배추를 키워 먹은 첫해에는 온통 초록 투성이인 배추 모습에 실망이 컸다.
그림같이 자라나는 배추를 기대했지만 달팽이나 청벌레의 엄청난 공격이 너무나 당황스러웠고, 손가락을 펴놓은 듯 활짝 피어난 배추의 모습에도 할 말을 잃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쌈채소로 활용이었다.
키워낸 배추는 낱낱이 잎사귀를 떼어낸 후 겉절이용으로 소비하고, 삼겹살을 먹을 때는 상추 대용으로 활용했는데, 그 식감과 맛이 기대 이상이었다.
은은한 배추의 단맛과 상추보다 단단한 식감.
아무리 야무지게 쌈을 싸도 쉽게 찢어지지 않아서 왜 진즉 배추를 쌈채소로 활용할 생각을 못 했는지 미련한 내가 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잎사귀가 초록빛으로 단단하게 자라고 그 크기가 손바닥보다 조금 커졌을 때 수확하면 모양과 맛이 봄동배추와 유사하다.
열심히 키운 배춧잎을 뜯어다가 봄동배추 겉절이 양념에 버무리면
끝.
봄동배추가 없는 곳에서 그와 유사한 맛을 보게 되면, 그 귀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못난이 초록 배추가귀한 이미테이션 봄동배추로신분이 격상하는 순간이다.
배추 모종을 정식할 때 조금 큰 화분에 단독으로 심어주고 빛 가림이 좋은 위치에 두면 그럴싸하게 배추 속이 차오른다.
이때도 속이 뽀얀 연노랑을 띄지는 않지만 연둣빛 속과 진녹색의 겉잎을 가진 제법 배추다운 모습으로 키워 낼 수 있는데, 문제는 청벌레와 민달팽이의 공격이다.
이 녀석들은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본격적으로 소중한 배추의 속살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갉아먹는데, 어찌나 야무지게 먹어대는지 몸집이 처음 두세 배 크기로 자라는데 하루면 충분하다.
커다란 배추로 키워내는 기대감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역할은 민달팽이가 8할을 담당한다.
끈적이는 진액을 질질 끌며 채소밭을 활개 하는 이 녀석들은 화학적 약품을 치지 않고서는 맥주나 왕겨 같은 방법으로 쉽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
벌레들과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너무 싫은 것을.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약을 치기는 싫어서 나무젓가락을 들고 하나하나 찾아내다 벌레들에게 배추를 넘기곤 한다.
물도, 햇빛도, 비료도, 구충도
모두 완벽하게 박자가 맞아지는
운이 좋은 어느 해에는
한국에서 사 먹던 배추 같은 모습으로
자라주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화분 배추 관리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주 만나는 행운은 아니지만
간간히 만나는 이런 기적을 기대하며
매년 배추 씨앗을 파종한다.
씨앗 파종부터 수확까지의 수고와 시간을 생각하면 인건비가 더 든다는 자괴감이 들지만, 내 손으로 키워내어 다시 내 속을 채워주는 일련의 과정에 정신과 땀을 썼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식물 키우기의 가장 큰 장점은 내가 노력한 결과를 과정을 통해서 예측 가능 하다는 것이다.
살면서 노력한 것만큼의 결과를 보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또 어떤 결론에 다다를지 미지수인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매번 성공하는 흙놀이는 아니더라도 그 노력의 끝에 어떤 열매와 결실이 나타날지 시각화가 가능하기에,
식집사의 수고는 스포 당한 결말을 알면서도 극장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관객과 같다.
어떤 결말일지 알기에 수고스러웠던 일들을 중간에 포기할 수 없고, 비로소 맞이한 결실 앞에서 내가 거쳐온 과정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하는 검증의 과정이다.
주중의 일상에 치여 살다 주말 아침 다시 찾아 갈 나의 '화분텃밭'은 나에게 그런 의미이다.
삶이 팍팍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때 자그마한 씨앗 하나에서 어찌보면 억지스러울 수 있는 삶의 의미 찾기 놀이,
그것이 나의 '화분텃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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