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식물 핑거라임, 톡톡 터지는 재미.

손가락을 닮은 이국적인 라임을 아시나요?

by 민영

내가 사는 이곳의 별명은 '봄의 나라'이다.


하루라는 시간 안에 뚜렷한 봄, 여름, 가을과 아주 순한 겨울이 함께하는 땅.

아침에는 카디건을 챙기고, 오후에는 반팔 차림이었다가 밤에는 두툼한 이불을 찾는 곳이다.


한낮에 비해 상대적으로 춥다고는 하지만, 영상 12도 이하로 내려가는 일은 거의 없는 곳이니 극한의 날씨를 가진 한국에서 온 내가 춥다고 호들갑 떨기도 애매하다.


해발 1,3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도시.

1년 내내 하늘은 맑고, 구름은 손에 닿을 듯 가깝다.

마치 오래전 윈도즈 바탕화면 같은 풍경 속에서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다만 이것이 인간에게도 좋은 것일지는 의문스럽다.

연중 일정한 기후라는 것은 눈이 녹아 새싹이 돋아나고, 낙엽이 물드는 극적인 계절감이 없다는 의미이기에, 허투루 보내는 나날들이 쌓이다 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몇 개월이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다.


매일이 같은 이곳에서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더장에 적힌 시즌명뿐인 나날들.


야근과 술, 스트레스로 바스러진 정신을 챙기기 위해 눈을 돌린 것이 식물 키우기였다.


주말이면 화원에 들러서 이것저것 사 모으기 바빴고, 그렇게 하나 둘 마당에 자리하기 시작한 화분들이 수십 개가 되었다.

10여 년 전 사 왔던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다육 식물들은 이제 두 팔로 안을 수 없을 만큼 자라났고, 식탁 위를 채워 주는 채소들은 생장 주기가 끝나기 무섭게 연중 새로 파종을 하며 화분을 채워왔다.




발견


힘든 날은 힘들어서, 좋은 날은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근처 화원에서 하나 둘 여러 식물들을 사 들였고, 파종했다.


하루하루 이곳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식집사로서의 경험은 많아졌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화원에 들러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문제가 생겨났다. 지루했다.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식물 종류라고는 기존에 키워봤던 경험들이 있는 것들 뿐이니, 한국이나 해외 유튜버들이 키우는 새로운 식물들 영상을 보며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지난 2024년, 호주가 원산지인 '핑거라임'이라는 식물을 이곳에서도 판매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정말 오랜만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지루한 일상 속, 새로운 무언가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도파민 터지는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핑거라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판매하던 '핑거라임' 묘목을 바로 주문하고, 일주일가량을 기다려 1m 남짓한 크기의 가느다란 녀석을 집에 들였다.


막상 수령한 핑거라임은 얇상한 몸매에 소심하게 생긴 열매를 맺고 있는 상태였다.


가지마다 제법 굵고 뾰족한 가시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니 라임 묘목을 구입한 것은 확실한데, 너무 비실해 보이는 이 녀석을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새끼손톱만 한 잎사귀와 흰색과 자주색이 섞인 자그마한 꽃도 그저 위태롭기만 했다.

집에 도착한 여리여리한 핑거라임 묘목의 꽃이 너무 작아 걱정 스러웠다.


처음 1년은 화분에서 적응을 하느라 꽃이 피었다 지기를 반복했다.


어쩌다가 열매가 열리게 되더라도 그 사이즈가 매우 작았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다 자란 것인 줄 착각해 수확하기도 했었다.


미성숙한 핑거라임을 참지 못하고 잘라보니 자그마한 실리카 겔 같은 알갱이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단단한 껍질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니 오돌토돌한 알맹이들이 옹기종기 올라왔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맛보니 독특한 식감과 진한 라임향이 미각과 후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비염인들은 이해할 것이다.

무언가의 맛과 향을 진하게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오랜만일지, 얼마나 충격이었을지.


그 작은 알갱이 하나하나가 라임맛을 이리도 오롯이 품고 있을 줄이야.

일반 라임보다도 강한 비타민의 맛이 오래도록 입안에 남았다.



성장


핑거라임 역시 마당의 다른 식물들처럼 매일 물을 챙겨주었다.


간간히 레몬 껍질이나 자몽 껍질등을 화분에 뿌려 주거나 해조류 액비를 섞은 물로 영양 보충을 해 주고, 꽃처럼 가득 피어난 깍지벌레와의 전쟁도 정기적으로 치러냈다.


그렇게 핑거라임과 함께한 지 1년 반이 지난 어느 날, 가지가 여럿으로 뻗어 나오고 귀여운 자줏빛 꽃들이 마디마디마다 가득 피어났다.


태풍이 잦았던 달에는 강한 비바람에 무수한 꽃잎이 마당을 나뒹굴어서 열매를 수확하기는 글렀다 싶기도 했었는데 기우였다.


비가 잠잠해진 주말 아침, 악천후를 이겨내고 자라난 앙증맞은 열매들이 몸집을 키워내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을 채워준 남편의 정성과 며칠간 강한 비를 동반했던 태풍의 영향으로 알맹이가 단단하게 차오른 라임을 키워낸 것이다.


핑거라임 열매들이 곳곳에 열려있다.

수확


진초록의 탄탄한 겉껍질이 최대한 팽창하며 토실해지다가 껍질에 하얀 튼살이 생기면 핑거라임 열매를 수확할 시기이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비틀기만 해도 토실한 열매들이 톡톡 소리를 내며 그릇에 떨어진다.

그릇 가득 담긴 핑거라임 열매들

핑거라임의 껍질만 만져도 진한 라임향이 느껴지는데, 일반 라임이 흔한 이곳에서도 이 녀석의 향은 독보적으로 진한 편이다.


이 귀여운 열매들을 만나려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왔다니.


연중 내내 만날 수 도 없는 귀중한 열매들을 작은 그릇에 가득 담아두고 뿌듯함을 만끽했다.

(더러는 내 손가락 굵기보다도 굴게 자라나서 어찌나 기특하던지.)

토실하게 과육이 들어찬 핑거라임 열매들

한껏 과즙이 오른 핑거라임은 식집사의 정신적 비타민이 따로 없다.


수확한 열매는 가운데 부분에 칼집을 살짝 내어주면 약간의 힘 만으로도 절반으로 갈라지며, 캐비어 같은 라임 알갱이가 '왜 이제 열어주냐'는 듯 쏟아져 올라온다.


잘 자라난 핑거라임을 먹을 때는 특별한 법칙이 없다.

흙놀이를 하다가 입이 심심할 때면 동그란 라임 알갱이들을 톡톡 터트리며 먹기도 하고, 식사 중간에 입안을 refresh 하기 위해 일부러 준비해 두기도 한다.

더러는 소주잔에 짜내어 상큼한 라임향을 함께 즐기기도 하는데, 일반 라임즙을 넣어 마시는 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이 독특한 과일들을 한국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도 맛 보여주고 싶은데, 이 멀리까지 부를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한국에서도 태국 등지에서 수입한 커다란 핑거라임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흔한 과일은 아닌 듯하다.)

알갱이 가득한 핑거라임
손으로 가볍게 누르기만 해도 상큼한 라임 알갱이들이 흘러나오는 핑거라임


요즘 마당에는 다시 핑거라임이 가득 열려있다.

점점 더워지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얼음을 넣은 탄산수에 핑거라임을 넣어서 흔들어 마시면 그 상큼함이 배가 된다.


화분텃밭에서 흙놀이를 즐기다 햇빛이 강해지면, 잠시 그늘에 앉아 핑거라임 음료를 마시고 낮잠을 자야지.


주섬주섬 남은 핑거라임들을 챙겨 들고 신 것 잘 못 먹는 남편을 골려주며 직접 키운 핑거라임을 맛 보여주는 주말을 보내야겠다.


https://youtube.com/shorts/Wb7RyfxE2p0?si=egH-8TAD6DzwvQl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