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식물 무화과, 꽃을 먹다.

꽃이 없다 하지 마오.

by 민영


'여름 방학'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외갓집', '무화과나무', '강아지', '외할머니 & 외할아버지'가 떠오를 만큼 무화과는 나의 어린 시절 기억에 항상 등장하는 식물이다.


매해 여름 방학마다 시간을 보냈던 외갓집 마당에는 3m는 족히 될 법한 아름드리 무화과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초등학생 아이의 두 손에 쥐어지지 않을 만큼 큼직하고 달콤한 열매를 내어주던 기억이 있다.


외삼촌들이 따주시던 무화과 열매를 사촌동생들과 한알씩 받아 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물면 오도독 씨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입안 가득 단맛이 가득했었다.


세월이 지나 그 아이들은 중년의 어른이 되었고, 커다랗던 무화과나무는 병충해에 고사해 버려 이제 더는 볼 수 없지만 무화과라는 나무가 남긴 어린 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


몇 년 전 친정 엄마의 뒤뜰에 무화과나무가 새로운 식구로 들어왔다.


나무가 터에 자리를 잡고 열매를 맺은 뒤부터 엄마는 해다마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따서 냉동실에 고이 얼려두신다.

1년에 한 번 만나는 딸에게 그해 열린 무화과의 맛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친정집 무화과의 달달한 기억이 혀끝에서 잊힐 때쯤, 나도 무화과나무를 집에 들였다.


외갓집에서 보았던 나무처럼 거대해지지 않기를 바라며, 화원에 들러 적당한 크기의 묘목을 구입해 화분에 심어 두고 챙기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말에 데려온 무화과는 몇 개월 사이 벌써 4개의 무화과 열매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성격 급한 녀석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첫 열매를 내어주더니, 순차적으로 단맛을 쌓아가듯 당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첫 무화과 열매의 맛에 실망했던 찰나, 두 번째, 세 번째 열매를 맛본 이후, 어느새 무화과나무의 관리방법을 배워서 무화과 부자가 되는 욕심을 내게 돼버렸다.


분명 시작은 '난쟁이 무화과'나무처럼 소소하게 키우는 것이 목표였는데, 무화과 열매의 맛이 달콤해질수록 사람의 간사한 마음이 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잎, 잎, 열매.


사람 손바닥같이 생긴 무화과 잎은 제법 큰 편으로, 이 녀석이 활짝 피어나기 전 모습은, 마치 두릅 같다.


돌돌 말려서 오므려져 있는 잎사귀들이 하나 둘 펼쳐지면, 성인 남성 손바닥보다도 크게 자라나는데, 매번 볼 때마다 경이로운 모습이다.


무화과 잎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커다란 잎들을 우산 삼아, 줄기 사이에서 무화과 열매가 올라온다.

동그란 초록 요철이 메인 줄기에 생겨난 것을 보고 '기특하다.' 중얼중얼..혼잣말을하고 지나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작던 열매가 금새 무화과의 모습으로 자라난다.


(이렇게 자라나는 무화과는 열매라기보다는 꽃이 맞는 표현이지만, 누군가의 명명으로 '꽃 없이 열리는 열매'가 되어버렸으니, 우리가 먹는 과육이 사실은 꽃이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들끼리만 아는 일로 둘 뿐이다.)


무튼, 무화과 열매가 제법 커지면 과일 보호망을 쳐주는데, 혹시나 지나가던 곤충이나 새들이 탐을 낼까 겁이 나서 그렇다.


사실, 지난 4개월간의 경험상 인간 외의 어떤 동물이나 곤충도 화분텃밭의 무화과를 탐내지 않아 했는데, 과일 하나도 자연과 나눠먹기 싫어하는 못 된 인간이 된 것만 같아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아무 일 없다고 해서 우리 동네 깡패 새들이 계속 지나쳐주리라는 보장이 없으므로, 열매 보호망은 꾸준히 챙기는 중이다.



씩씩한 나무


무화과는 키우는 동안 식집사가 해 줄 것이 거의 없다.

많은 수확을 바라면 화분 용량을 키워서 심어주고, 1년에 한두 번 nk 비료정도를 추가하면 된다.


열매도 혼자 열려내고, 햇빛을 오래 받게 해 주면 단맛도 알아서 올린다.


과도한 양분도, 지지대도 없이 잘만 자라준다.


혹여나 가지가 부러지면, 그 가지를 주워다 바로 삽목도 가능할 정도로 씩씩한 식물인데, 이런 무화과의 단점은 열매의 보관 기간이 짧다는 것 정도이다.


무화과는 화분에서도 잘 자라나는 식물 중 하나라서 화단이 없는 사람도 넉넉한 크기의 화분에 심어주기만 하면 맛있는 열매를 큰 노력 없이 수확할 수 있다.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라나기 때문에 겨울 기온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는 냉해를 입지 않게 챙겨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다.


과일을 품고 있는 식물이기에 하루 일조량도 8시간가량은 유지해 주어야 성장에 무리가 없으니, 집 옥상처럼 하루 종일 해를 볼 수 있는 곳에서 큰 화분에 식재하여 키우기를 추천한다.


물론 1년 내내 일정한 기후를 가진 나라에 사는 나 같은 게으른 식집사는 물만 주면 되기에 이보다 찰떡궁합인 과실수는 없을 듯하다.


무화과 열매가 익어간다.


식물의 시간


처음 수확 때는 조바심에 조금 일찍 수확한 탓이 '무맛'과를 즐겨야 했는데, 수확 타이밍에 시기를 넘겨 수확했더니 단맛이 가득한 과일로 자라나 있었다.


늘 그렇듯 식물의 시간을 기다리는 인간의 시계는 언제나 엇박자다.


이르거나, 늦거나.


언제쯤이면 그 시간을 제때 맞출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새로운 잎사귀가 피어났나 싶다가도 어느새 열매가 열려있고, 언제 수확하나 싶다가도 어느새 저 혼자 떨어질 정도로 익어버린다.


새벽 이슬이 촉촉할 때 집을 나섰다가, 달이 올라올 때 귀가하는 식집사의 시간을 기다려주는 식물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는 하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의 변화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기록하고 싶지만, 식집사의 삶을 유지하려면 품팔이를 해서 일상을 살아야 하므로 오롯이 식집사로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대부분의 경우 식물의 자유 의지에 맡길 수밖에 없다.


때를 늦게 맞춰 상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곤충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거나 씨앗이 내부 발아를 시작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식집사의 경험치가 더 늘어나고 식물의 생장에 대한 이해가 쌓이면 이런 시행착오가 줄어들려나..


다른 잎채소들에 비해서 성장 속도도 빠르고 상하는 속도도 빠른 무화과를 키우면서, 직장인 식집사로서의 한계를 자주 느끼는 중이다.


화분에서 수확한 무화과를 잘라 보았다.


화분텃밭에서 찾는 비타민과 천연당



먹고살기 바쁜 나날들 속에서 사람들을 통한 에너지 충전이 나에게는 갈수록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시끄러운 술자리도, 왁자지껄한 식사자리도, 다 지루하다.

만나는 사람을 최소화해서 상처를 덜 받고 싶고, 불필요한 감정소모와 시간 할애를 최소화하고 싶다.


조용히, 그렇지만 누구보다 명확하게 필요한 것을 말해주는 식물들과의 시간 속에서 나름의 비타민을 찾아내고 천연 설탕을 처방받는 중이다.


무화과, 포도, 핑거라임, 그리고 여러 잎채소들이 그것이다.

화분에서 수확한 과일들


열매를 수확하고, 내가 키운 잎채소를 소비하며 몸보다 마음을 챙긴다.


말 없는 식물들의 시끄러운 요구사항들을 살피느라 인간사의 소음을 들어줄 여유가 없다.


10대 시절의 무모함, 20대의 패기, 30대의 열정이 40대에 들어서니 속도를 낮추고 싶어진다.


이제 인간들의 소음보다 식물들의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이러다 식집사 경력이 더 쌓이면 자연인이 되려나?




어린 시절 무화과 열매 하나를 손에 쥔 날에는 곱슬머리를 타고 흐르던 여름날의 땀도 즐거웠었다.


그날들을 잊고 살며 사람들 사이에서 내 자리를 만드려고 아등바등하느라 식물들을 잊고 살았다.


몇 십 년의 시간을 돌고 돌아 40대의 내 손에 다시 쥐어진 무화과 열매가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드라이로 곱게 세팅했던 머리카락들이 흙놀이에 땀에 젖어 꼬불거린다.


식집사인 덕분에 네일아트 한번 하지 못하지만 화분들의 분갈이를 하고, 모종을 심고 상한 잎사귀들을 정리하느라 상처 투성이인 내 손이 좋다.


이게 사는 재미리라 생각한다.


***

의도치 않았지만내가 키워내는 식물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억들을 따라가다 화분에 심어 곁에 두었는데, 다행히도 대부분 화분 생활을 잘 견뎌주는 식물들이었고, 그 식물들을 키우며 잊고 지내던 일들도 다시금 떠오른다.


무화과 열매 하나에서 30년 전 시골 마당에서 올려다보던 무화과나무가 생생해지고,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달큼한 향도 느끼는 중이다.


얼마 전 새로 분갈이를 해 준 무화과나무가 더 큰 화분을 원하는 날이 오면 또 얼마나 많은 새로운 추억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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