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삼매
3. 삼 매
반야경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까? 그 중 하나가 바로 삼매일 것이다.
학교 교육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이것은 이것이라고 억지로 외우게 하는 점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불교도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억지로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느 한 곳에서 눈치 채기 시작하면 다 똑같은 의미로 연결하면서 도미노처럼 이해하게 되는 것이 불교이다. 반야에서 깨달음이 오면 그 다음부터 일어나는 것들이 다 반야가 연결한다. 강아지가 싫었더라도 반야를 깨달은 뒤에는 예뻐 보이고, 세상이 예뻐 보이기
시작한다.
삼매의 원인과 결과
삼매는 꽤 큰 주제라서 만약 반야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삼매에서는 많은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부처님의 최초의 가르침이 사성제이다. 사성제는 역시 삼매와 역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높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탈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삼매는 집중하는 것이다. 불교는 나와 관련 있는 것에 깨달음의 가능성을 주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 그렇다고 불교 전체가 철학은 아니다.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사변철학이라고 하는데, 철학은 자칫 머리로만 끝날 수 있다. 삼매도 마찬가지로 단어가 가진 집중으로만 기억하면 손해가 크다. 삼매에 들었다고 할 때는 집중력도 있어야 하고, 누가 봐도 선(善)해서, 선한 결과를 가져 왔을 때를 말한다. 바둑할 때도 집중하지만 삼매에 들었다고 하지 않는다. 독서삼매에 빠졌다고 흔히 하지만 그 사람이 내는 결과를 봐야 합니다. 집중으로 끝나는 경우는 삼매라 하기 어렵습니다. 삼매에 들 때는
동기와 결과를 봐야 한다. 떡을 썰더라도 시합하기 위해서 집중했다면 삼매라 할 수 없다. 염불 할 때도 자칫 염불에만 집중하고 선도 악도 아닌 상태에 머물 수 있다. 염불하는 목적이 선하고, 염불한 뒤 결과가 선하게 바뀌었다면 염불삼매라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정의한 삼매는 이 정도지만 삼매는 많은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주제이다. 삼매가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공(空)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삼매는 집중되어 있어서 결과는 착하고, 행위의 주체가 비어 있는 공이어야 한다. 만약 어떤 것을 기대하면서 집중하고 있다면 삼매가 아니다.
3가지 삼매- 무원(無願), 무상(無常), 공(空)
염불하면서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면 삼매라 하기 힘들 것이다. 그냥 간절히 바랬을 뿐이다. 공(空)을 얻는 자가 삼매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공(空)은 하고 있는 행위 안에서 무언가를 바라는 내가 없는 것이다. 어머니들은 밥상을 차리시면서 ‘내가 했는데’ 라는 생각을 안 한다. 집에서 부인이 ‘내가 만들었는데 맛있게 먹고 나가네...’ 한다면 오류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상대가 칭찬을 했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꾸중을 했다면 정신적인 피해가 올 것이다. 하지만 공의 원리를 깨달았다면 나쁜 것에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칭찬에 무덤덤하기는 쉽지만 욕에는 견디기 힘들다. 칭찬을 받아도, 욕을 먹었더라도 대상이 되는 내가 없다는 것이 공(空)이다.
내가 없다고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면 무책임이다. 불교의 공이나, 무원, 무상을 잘못 이해하면 허무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수행하는 보살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살은 중생이 맛있게 먹어주길 바랄 뿐 열심히 밥상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밥을 하면서 내가 한다는 생각도 없고, 맛없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대부분 맛없는 밥을 지을 수 있다. 밥을 맛있게 짓는 사람의 특징은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면서 해야 밥을 맛있게 지을 수 있다. 공을 잘못 배우면 끓지 않는 물에 라면을 넣을 수 있다. 무얼 바라는 것은 공(空)이라 할 수 없지만 단지 맛있게 먹기만 바란다면 입장이 달라진다.
그래서 나온 수행이 ‘무원無願’이다.
공의 집중된 상태에 도달하되 원하지 않는 상태로 가겠다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무원의 필수조건은 중생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지만 내가 얻을 것이 없다고 아는 것이다. 좋은 것도 주인공이 아닌데, 나쁜 것은 더욱더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길은 위험한 길을 막아 주고 있는지 모른다. 불교의 새로운 교리가 등장하는 배경은 이전 교리가 가지고 있는 헛점으로 중생들이 착각할 수 있는 모순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무원도 공사상으로 착각할 수 있는 부분을 보완하고 있다. 그래서 공과 무원을 삼매라 한다. 무원삼매, 무상삼매 모두 공(空)과 하나 되는 것이다. 공삼매는 뭘 했는데 ‘제가 했는데요!’ 라고 손드는 습관이 사라지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세상을 넓은 가슴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여행을 많이 하는 것도 여행이 일체법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일체법을 접한 후 얻는 세계관 중 하나가 역시 ‘공’ 이다. 여행을 잘한 사람은 공에 달통할 수 있다. 세상을 많이 만나서 다양한 모순을 발견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공이 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대상과 하나 되어 있으면 처음부터 ‘내가 이렇게 했는데... .’ 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
삼매가 처음부터 끝까지 좋다는 것은 아니다. 공(空)을 나 혼자만 보면 안 됩니다.
내가 맺고 있는 많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결과가 공이 됩니다. 결과는 공이지만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다. 대개는 삼매까지 이르기 힘들어서 무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난 다 버릴 수 있다고 해도 못 버리는 것 하나는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대개는 버리지 못하는 절대적인 것, 하나 마저도 다 버린 상태를 공이라 보는 것이다. 삼매의 접근은 쉽지만 곧 붓다의 상태다. 세 가지 삼매가 있으면 부처님과 같은 완전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공- 비어 있어야 되고
무원-바램이 없어 공과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하며
무상-‘그렇게 했-네’라는 모양이 없어야 한다.
이 중 가장 넓은 범주는 공(空)이다. 불교에서 가장 앞에 나오고 많이 얘기하는 주제이다. 너무 쉽기 때문에 앞에서 풀어주고 있다.
무상은 어려운 주제이다. 어떤 분이 큰 스님께 꾸중을 듣는데.
/저는 열심히 일도 했고, 그걸 내가 했다고 잘난 척도 안 했는데요..../
/거, 상이 왜 이리 많느냐!/
이 때는 상(想)은 왜 그걸 기억하느냐. 큰스님께 또 꾸중을 듣는데, 기억하면 손해를 본다. 모양을 기억하는 한 나를 찾을 가능성이 작아지고, 모양으로 인해 무언가를 바랄 가능성도 커진다. 훌륭한 사람일수록 이런 특징이 사라진다. 애완견은 기르는 사람은 어느 정도 무원의 경지를 알고 있다. 애완견은 어차피 사람에게 줄게 없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아파서 치료해 줘도 갚지 않는다. 그것을 알면서도 치료하는 주인의 마음은 무원(無願)이다. 불교는 내가 깨달았는지 스스로 알 수 있는 자가 진단을 3삼매로 할 수 있다. 나는 바라는 게 없고, 욕망도 없고, 세상이 돌아가는 12연기를 깨달았다고 해도
/내가 불교공부를 5년 했는데, 나는 회사 사장인데, 나는 어떤 경력이 있는데.../
삼매에 들지 못한 건 바로 이런 상! 때문입니다. 공, 무원, 무상 을 늘 생각해야 됩니다. 비어있고, 바랄 바 없고, 모양이 없다면 부처님께서 인정한 분이지만 인정받기 위해서 갖는다면 이미 틀렸다. 인정받기 위한 마음이 있다는 것은 부처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상이 생긴 것이라서 처음부터 많은 결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저절로 오길 기다려야 한다. 턱턱 막히더라도 휙 어딜 갔다 오면 해결되는 시점을 발견하면 그 후부터 복잡하고 어려웠던 연결고리들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여행을 권한다. 삼매의 또 다른 특징은 종착역이라는 것이다. 삼매를 거쳐 어딜 갈 곳이 없다. 삼매는 주변 관계에서 행복해야 한다. 삼매를 얻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같이 따라가지 않는다. 삼매에
드신 부처님의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랐다. 말을 바꾸면 삼매도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어있고, 무원이고, 무상하니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아차릴 것이 있다. 사람들은 입놀림에 빠져서 당신은 ‘나’라는 말을 했으니 ‘삼매가 아니네~’ 한다면 이것은 오해다. 공은 ‘나’ 라는 그 자체를 부정하는 개념이 절대 아니다. 바로 /내가 했네-/ 라는 결과에 대한 행위를 부정할 뿐이다. 우리는 논리에 빠지면 안 된다. 무상도 마찬가지다.
/당신도 이렇게 행복하다는 모양새가 있네. 그럼 안 되겠네./
불교는 집착을 일으키는 모양새를 부정할 뿐입니다. 대승불교라도 초기 불교의 4성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저런 교리들이 출현할 수 있을까. 4성제- 고, 집, 멸, 도를 완벽하게 체득하기 위해서이다.
일체 세간은 괴로움을 깨닫지 못해서, 며칠 여행을 갔다 오면 괴로워지지 않게 된 이유가 3삼매 중 하나를 가져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도는 방랑자들은 세상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덜 괴로울 수 있다. 스님도 사실은 방랑자, 또는 유행자라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는 바라나시에서 수행하셨다고 하지 않고, 유행하셨다고 한다. 유행이 가진 한자의 의미는 노닐며 가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 나는 잘 노닐었네 하면 가는 도중에 부딪히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싸우거나 배고픔이 많았다면 잘 노닐었다고 하지 못한다. 노니는 사람은 결과야 어떻든 착하고, 욕심도 없다. 유행하는 습성이 초기불교에서는 고(苦) 를 해결하는데 실마리가 되었다면 대승에서 완전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게 된다. 산에 들어가 나무 밑에서 고행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초기 불교 방식으로는 고를 해결하기 힘듭니다. 이런 방식은 마음을 차단시켜야 되는데 이것이 통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효과가 있고, 대부분 중생은 효과가 없다. 고(괴로움,苦)을 박멸하는 최선의 처방은 3삼매가 될 수 있다.
집착과 욕망이 있어서 고가 일어난다면 해결책은 공과 무원이다.
비어있고, 집착하지 않게 되어 욕망이 사라진 상태, 고가 사라진 상태, 곧 멸이다. 3삼매의 상태는 니르바나(열반) 이다. 부처님께서 멸(滅)의 상태에 드셨으니, 모든 중생도
멸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을 주고 계신다. 그래서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 중 하나가 바로 3삼매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8정도를 제시하고 있다.
8정도는 대단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잘 먹히지 않고 오히려 부딪힌다. ‘바르다’ 가 어렵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도 자이나교와 사이가 안 좋았고, 데바달타와 원한 관계가 있었지만 바르게 사시는 분이기 때문에 바르게 극복하셨다. 하지만 ‘바르게’만 가지고 해결하지 못하는 주제가 많다. 아이를 바르게 키우고 싶지만 아이들이 반발할 수 있다. 원하는 만큼 잘 되지 않는다. 8정도가 어렵고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바르게 보기 위해서 이다. 불교는 이렇게 무궁무진하다가 처음으로 돌아가면 확 풀릴 수 있다. 8정도를 배우기 위해 그랬구나! 위대한 불교 학자들이 꼽는 항목이 8정도이다. 쉽게 드러나지만 가는 길은 하나하나 어려웠다. 반야사상 이후 쉽게 해결하는 방식으로 나온 것이 반야이다. 반야를 보되, 내 판단 기준을 넘어서는 원천적인 빛으로 보는 것이다. 내 알음알이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뛰어넘는 빛의 힘으로 보라. 저절로 빛을 내기 위한 방식은 삼매가 알려주고 있다.
경전에 나오는 말씀중에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3가지 머무름이 있으니, 하나는 하늘에 머무름, 범왕에 머무름, 성인의 머무름이다./는 구절이 있다. 우리가 사는 3가지 모습이다.
신처럼 사는 방법에는 잘 베풀고, 남 아프게 하지 않고, 착한 마음으로 살았다면 죽어서 신들의 세계에 가고 범천은 신들의 제왕이 사는 곳으로 자, 비, 희, 사를 잘 수행한 사람이고 성인의 머무름은 공, 무원, 무상의 삼매의 특징을 가진 사람이다. 삼매는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서, 무수한 삼매가 있을 수 있다.
공을 잘 관찰하는 것으로도 삼매를 얻었다 할 수 있다. 삼매는 보살도로써 시방세상을 하나 하나 알아야 깨달을 수 있다. 시방세계에는 여러분이 만나는 무수한 인연들이다.
하다못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만나는 햇빛. 공기, 차를 타고 다니며 보는 가로수를 비롯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만나는 모두가 부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부처로 보는 게 아니고 내 주위의 무수한 부처를 보기 시작하면 삼매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만약 염불로 삼매에 들었다면 염불삼매는 갖가지 번뇌와 전생의 죄업을 없애준다고 한다. 시방(십방)에 두루 부처님이 계시는데 여러분 주위가 얼마나 안전하겠는가!
수필가 채선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