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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짜미 Jul 30. 2024

나보다 나이 많은 욕실을 부쉈다.

pac man

-지난 이야기-

  아내와 맛보기로 공사를 하루정도 체험하고 본 공사에 들어가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한 가지 있다.

'아파트 주민분들의 동의 구하기.'


  아내와 나는 주변사람들과 친하게 그리고 신나게 곧잘 웃고 떠들며 지내는 타입이다.

  실례를 끼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반대로 혹여나 실례를 끼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조심하고 눈치를 보는 타입이다. 그래서 이번에 공사를 계획하면서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주민분들에게 끼칠 실례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주민분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해드리기 위해서 작고 소소한 그렇지만 꼭 필요한 선물을 준비했다. 그건 다름 아닌 행주와 종량제 봉투. 아내와 나는 집 방바닥에 앉아서 한 장 한 장 마음을 담아 접고 하늘색 포장용 봉투에 담아 넣었다.


  동의를 구하기 전 아파트 앞에서 아내와 나는 온갖 하찮지만 귀여운 질문들을 서로 쏟아부으며 워밍업을 했고 최고층부터 차례대로 내려오며 동의를 받았다. 이런저런 형태의 다양한 분들이 계셨고 모두들 큰 걱정의 말씀 없이 열심히 해보라며 응원의 말씀을 남겨주셨다. 우린 연신 고맙다 죄송하다 언제든 놀러 오셔라 등의 말씀을 드리며 인사를 드렸다. 낮시간이라 집에 많이들 계시지 않아 두 번 정도 왕복하여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동의를 받은 서류를 들고 방학식을 한 초등학생처럼 신나게 관리실로 달려갔고 관리소장님은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남겨주셨다. 앞으로의 공사내용을 말씀드리고 놀러 오시라는 이야기도 빼먹지 않고 전했고 드디어 우리도 당당하게 공사를 할 수 있게 됐다.


  부디 다치지 않고 공사를 끝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중이다.


-이번 이야기-


  나는 공사를 하는 동안 아내의 본가 2층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 뭔가 데릴사위 같은 느낌이지만 내가 본가에서 다니기에는 거리가 좀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본가에서 더 가까운 것도 있었지만 갈 때마다 각자 따로 움직이는 게 너무 큰 소모이지 않겠냐는 서로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였다. 한 주에 한두 번 정도는 아내의 본가에서 자고 갔던 터라 아내의 본가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고양이들도 나를 익숙해할 정도였기에 낯설거나 하는 그런 불편감은 없었다. 잠들기 전까지도 아주 자연스럽고 평온한 저녁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불속으로 폭 들어가 누웠고 내 기분은 그때부터 오묘한 감정들을 쏟아냈다.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스르륵 잠이 들었고 순식간에 아침이 찾아왔다.


  아침에는 눈이 번쩍 떠졌다. 눈이 번쩍 떠진 그 느낌은 뭔가 비장했다. 그러나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이 느낌은 설렘인가 걱정인가. 혹은 둘 다 인가. 스스로에게 이상한 질문을 쏟아내고 나서야 정신을 붙잡았다. 나는 긴장을 하면 아침 일찍 잠에서 깨는 타입인데 당일날은 어김없이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한 다섯 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났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합격하여 회사에 취직하여 첫 출근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기분이었다. 물론 나는 오랫동안 준비하고 합격하여 회사에 취직한 일은 없기에 그 기분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나는 꼭두새벽부터 사부작거리며 내가 갖고 있는 잡다한 공구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차에 싣고 갈 준비를 했다. 그 덕에 아내는 내가 신경이 쓰였던 듯 꿈나라에서 더 헤엄치지 못하고 일어나게 됐다. 아내는 일해야 하는데 밥을 든든하게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그 많은 잠을 이겨내고 나를 위해서 아침준비를 해줬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챙겨 온 공구들을 들고 집으로 올라갔다. 챙긴 공구는 철거를 위한 공구들이었다. 철거를 위한 공구는 이전 베란다 하부 낮은 벽을 철거할 때 사용한 공구들과 거의 흡사했고 추가로 스패너나 드라이버 등 자잘한 공구들을 더 챙겼다. 철거공구를 챙긴 이유는 오늘의 목표가 욕실 철거이기 때문이다. 집 안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이면 아파트가 들어서고 한 번도 교체되지 않은 나보다 나이 많은 타일과 욕조 변기 세면대를 포함한 이런저런 액세서리들이 사라질 예정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순간 머릿속에 '그냥 이걸 추억 삼아 이대로 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그 생각이 '찰나의 정'이라는 걸 느끼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앞으로는 볼 수 없을 테니 시작 전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낡고 오래된 타일과 주황색 욕조, 핑크색 변기가 놓여 있는 욕실에는 공허한 '찰칵' 소리만이 울렸다.


  아내와 의기를 투합하고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액세서리 제거였다. 액세서리란 욕조나 변기 세면대처럼 큼지막한 기구들이 아닌 휴지걸이, 수건걸이, 수전 등 자잘한 기구들을 말한다. 냅다 부숴버리다가 수도관을 잘못 건드려 물바다가 될 수 있으니 스패너로 살살 달래며 풀어주고 30년 동안 욕실에 있었으니 부식될 만큼 부식되어 버린 새빨간 나사들도 조심히 분해했다. 거울은 뒤에 본드와 실리콘이 같이 붙어있어서 떼어내는데 힘이 들었다. 그냥 당겨버리자니 너무 휘어서 깨질 것 같았다. 거울이 깨지면 치우는 것도 알이지만 누군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거울은 아내와 함께 들고 베란다에 보관했다. 물론 다시 사용할 예정은 아니지만 거울을 깨서 버릴만한 용기가 아직은 부족했다.

  욕실에는 마치 옛날에 먹던 '바이오 사탕'같은 색깔의 흐릿한 주황색의 욕조와 세면대가 있다. 찾아보니 이 욕조와 세면대는 거푸집 같은 틀에 부어서 만드는 오닉스라는 재질이었다. 오닉스는 약간 돌과 유리(?) 플라스틱(?)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정도의 강도를 지녔다. 그래서 망치로 때려서 깰 수 있었고 폐기물 처리를 해야 하기에 도기인 양변기를 포함하여 모두 망치로 깨서 폐기물 마대에 담았다.


  기구들을 철거 후 벽면 타일 철거를 시작했다. 타일에 관해서는 이래저래 많이 알아봤는데 저렴한 공사금액을 제시하는 곳은 대부분 '덧방'이었다. '덧방'이란 기존의 타일 위해 새로운 타일을 붙이는 방식이다. 덧방은 철거하는 비용이 줄어들고 기존 타일의 수직이 잘 맞아있다면 시공도 간편하기 때문에 큰 금액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큰 단점도 존재했다. 덧방을 하면 그만큼 저렵하고 빠르게 할 수 있지만 덧방 하는 만큼 공간이 좁아진다는 사실이다.

  타일 한 장 붙이는데 뭐 그리 좁아지겠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일만 붙이는 게 아니라 뒤에 타일밥(타일 본드)이 들어가기 때문에 벽에서 약 3~4cm 정도 들어오게 된다. 안 그래도 좁은 화장실인데 양 사방으로 4cm가 좁아진다면 실감하는 건 더 크게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덧방을 할 때에 기존 타일이 제대로 붙어있지 않다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 혹 좁아지는 게 상관없다 할지라도 기존 타일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필수 중에 필수다. 타일이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노크하듯이 손가락으로 통통 쳐보는 방법이다. 노크했을 때 딱딱한 소리가 난다면 제대로 붙어있다고 예상할 수 있고 비어있는 소리가 난다면 타일 뒷면에 타일밥이 붙어있지 않은 곳이라는 소리다. 또한 딱딱하긴 한데 통통 튀는 소리가 난다면 타일밥은 있지만 접착되지 않고 떠있다는 소리다. 우리가 구매한 집의 타일은 50% 정도가 딱딱하지만 통통 소리가 나는 타일밥은 있지만 접착되지 않아 떠있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들로 모두 철거를 하고 새로 타일을 시공하기로 결정했다.

  타일본드가 벽에 제대로 접착되지 않아 타일을 떼어냈을 때의 벽은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타일밥은 타일에만 붙어있고 벽은 깔끔했다. 빠루를 넣어서 타일을 당겼는데 깔끔하게 떨어진 것도 모자라서 그 위칸까지 같이 떨어졌다. 타일밥이 벽이 접착된 곳들과 얽히고설켜 줄눈이 타일들의 일체화 역할을 해서 지금까지 떨어지지 않고 버텼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쉽게 떨어진다고?'

  부실공사가 되어있어 찜찜한 마음이 있었지만 어차피 철거를 할 거라면 떼어내기 쉽게 부실공사가 되어있는 편이 더 낫긴 했다. 나는 타일 두어 장을 떼어내서 공구를 사용할 공간을 만든 후 한 장 한 장 철거를 진행했다. 두어 장이 떨어지고 나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손만 가져다 대도 타일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나름의 쾌감(?)을 느끼며 빠르게 철거를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그 쾌감과 빠름은 얼마 가지 못 했고 그건 그 벽면에 한정된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다음 벽면으로 넘어가고 나서 깨달았다.


  세면대가 붙어있는 면의 타일이 우수수 떨어져서 빠르게 철거를 진행하고 욕조가 붙어있는 옆벽면으로 이동했다. 전과 동일하게 망치로 타일 한 장을 깼다. 깨진 부분으로 빠루를 집어넣고 타일을 당겼다. 근데 웬걸 모퉁이만 살짝씩 깨지고 타일이 떨어지지 않았다. 접착이 잘 되어있었다는 뜻이다.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이곳저곳을 망치로 구멍을 내서 당겼지만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망치로 꺤 구멍으로 파괴해머를 들이댔고 나의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세면대가 붙어있던 벽면은 5분 만에 철거가 끝났지만 남아있는 세 면은 타일 두 장 떼어내는데 5분이 걸렸다. 타일은 짱짱하게 잘도 붙어있었고 장비도 너무 무거워 팔에 힘이 점점 빠졌다. 욕조가 있던 벽에는 욕조 높이만큼 타일이 붙어있지 않아서 그나마 벽면의 2/3 정도만 철거하면 됐기에 나름 위안을 삼았지만 그러기에도 너무 힘들었다.


-'타일이 잘 붙어 있으니 욕조가 있던 아랫부분을 새로 붙여 메우고 이 면 전체에 덧방을 할까?'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첫 번째 면을 수월하게 보내고 이제 고작 두 번째 면인데 나는 괜히 힘들이지 않고 편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엉망으로 구멍이 난 벽을 보며 고민하는 내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당장 이 면만 철거하고 끝이라면 어떻게든 하겠지만 나에게는 이 벽면보다 더 넓은 두 벽면이 존재했기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아내에게도 "여차하면 그냥 덧방을 해야겠어"라는 운을 띄워뒀고 아내는 "맞아 너무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그냥 덧방 하자"라는 대답을 해줬다. 이 한마디 대답에 나는 묘하게 청개구리의 모습이 씌워졌고 '아내가 날 걱정해서 덧방 하자고 하는데 그럴 순 없어'라는 이상한 정의감에 불탔고 그 의지가 모든 벽을 철거하게 된 불씨가 되었다.


  그때 철거하던 모습은 나만 느낄지 모르겠지만 마치 비디오 게임으로 나온 팩맨(pac-man)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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