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턴, 캐나다
밸런타인데이+아내 생일+결혼 10주년 기념을 한 방에 해결하는 대형 프로젝트, 하와이 여행이라는 카드를 미리 꺼내 놓고 이웃의 남편은 3주간 출장을 가 버렸다. 독박육아와 눈 치우기 지옥에서 허덕 허덕거리던 이웃은 친구들과 모처럼 맥주를 곁들인 저녁식사 자리에 가기로 했고, 둘째 딸과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인 그 집 아들을 4시간 정도 저녁시간에 봐주기로 했다.
5시쯤 저녁을 미리 먹이고 6시까지 아이를 데리고 온다기에 우리 집도 30분 정도 저녁을 일찍 먹는 스케줄로 남편에게 미리 귀띔을 해 뒀는데 하필이면 이날, 남편이 예정에 없이 친구를 데리고 왔다. 친구의 짐을 지하실구석에 보관을 해 주기로 했다고 한다.
얼마 안 된다고 해놓고 20킬로는 넘어 보이는 커다란 박스가 일곱 개에 자잘한 가방도 몇 개 더 보인다. 기한도 없이 언제까지라는 구체적 날짜도 없다. 생각보다 많은 짐에 미간이 찌푸려지지만 너무 썩은 표정은 짓지 않으려고 입가에 힘을 주고 무표정을 유지한다.
다행히 비빔밥을 저녁 메뉴로 선정해 놓고 재료 준비를 한 터라 4인분을 5인분으로 만드는 건 딱히 수고스럽지 않아서 밖에서 둘이 저녁 사 먹고 술 사 마시면서 돈 쓰지 말고 집에서 같이 먹자고 하니 좋아라 한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이렇게 될 예정인 거를 혼자만 몰랐었나 보다.
대학시절 길거리에서 정치적 이슈로 시위하던 도중에 만나서 친해진 사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 20여 년 사는 동안 거의 연락 못 하고 지내다가 최근 다시 연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이제 40대 후반을 향해 가니, 사람을 이용 가치로만 판단해서 곁에 두는 사람은 쉽사리 눈에 보인다.
저번 방문에는 우리집에서 본인 옷 한 보따리 가져와 세탁 건조 하고 가고 본인 볼 일 보러 가는데 남편 불러내서 태우러 오라 여기 저기 운전해 달라 운전기사로 부려먹질 않나, 주변에 믿을 만한 친구가 한 명도 없고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계속 주변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그의 불평을 듣고 있자니 끼리끼리 모인다는데 왜 주변에 친분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생각해 본 적은 있냐고 말하고 싶은걸 꾹 참고 지상층에서 어린이들이 노는 동안 방해 되지 않도록 지하실에 머물러 있으라 하니 본인이 가지고 온 짐 속에서 32캔들이 맥주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룰루랄라 지하실로 내려가는 게 좀 얄밉다.
이번 방문이 처음이 아니고 벌써 서너 번째쯤 되니 저 32개들이 맥주가 다 없어지기 전에는 이 집을 나서지 않을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저번에 다녀 갔을 때도 그 이후 며칠 동안 남편은 뒤집어진 위장으로 고생을 했었다. 또 저러고 있는 걸 보자니 니들이 아직 스물몇 살인 줄 아냐고 확 소리를 질러 버리고 싶지만 말로 해봐야 잔소리로만 들을 것 같아서 남편이 스스로 느낄때 까지 적당히 기다려 주기로 했다.
아이들은 같이 레고를 가지고 놀고, 수다를 떨고, 비디오 게임을 하고 만화책을 보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하면서 신나게 떠들고 나는 그래도 혹시나 애들 사이에 마음 상하는 일이 있거나 투닥거리는 일이 생길까 봐 촉각을 세우고, 부엌에서 책을 읽는 시늉을 하며 보이지 않게 애들을 보고 있었다.
동시에 어른이 둘 어린이 셋을 베이비시팅 하느라 진이 빠지는 중 저녁 10시경 드디어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진 앞집 그녀가 아들을 데리러 왔다. 나도 맥주 한 캔 뺏어 먹어야지 하고 지하실에 내려가니 그새 둘이서 그 많은 걸 거의 다 마시고 두 어른이 들은 지하실이 떠나가라 큰소리로 자기 말만 서로 하고 앉아 있다.
앞으로 재방문 시 입장료를 받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