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턴, 캐나다
둘째 딸이 반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되었다. 그 아이의 가족은 3년쯤 전에 이란에서 캐나다로 망명했다고 하는데 파티를 하기로 한 키즈카페에 도착하니 나 빼고 다들 페르시아어를 한다. 인샬라! 이란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는 생일 파티에 뜬금없이 시키지도 않은 한국인 대표 자리를 꿰찼다. 나 말고는 길게 대화해 본 한국인이 한 명도 없었다니 은근히 부담된다. 그들이 아는 한국인들은 죄다 대중매체로 접한 멋지고 잘생기고 잘 나가는 연예인들이 아니던가.
정치 이야기 금지! 종교 이야기 금지! 여성 인권 이야기 금지! 뭐 이렇게 저렇게 이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 빼고 나면 날씨 이야기가 남는다. 날씨 이야기로 대동단결하며 혹독한 캐나다 겨울 날씨 이야기로 말문을 트니 한류로 방향을 트는데 내가 티브이를 안 보고 살다 보니 막상 이것도 대화가 길게 이어지는 주제는 아니다. 결국 얼마 전 클라이밍 선수 중 한 명이 히잡을 두르지 않고 한국에서 열린 클라이밍 대회에 참석했다가 곤경에 쳐해 졌다는 이야기를 꺼내고 이란의 여성 인권 이야기로 흘러가긴 했다.
오늘 모인 이란 출신 엄마들 중 누구도 히잡이나 부르카를 두른 사람이 없다. 캐나다에 터전을 잡고 살기로 하면서 각자의 사정에 맞게 적응하고 있는 듯하다. 부모 세대는 영어가 제2외국어라 자국어의 억양이 강하게 섞여 있는데 여기 온 지 3년이 넘은 아이들은 원어민과 다름없는 영어를 구사하며 부모와는 모국어로 대화하는 게 익숙해 보인다.
하필 요즘 특히 이란에 부는 한류 열풍인지 아니면 그냥 여기 청소년들 사이에도 유행인지 초대받은 아이들 중 6학년 여자 아이 두 명은 BTS와 BlackPink의 골수팬이고 내가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다 하니 일단 비명부터 지르고 시작한다. 그 아이의 아빠 역시 서투른 영어로 대장금의 열혈 애청자임을 밝힌다. 대장금의 영어제목을 어디서 언뜻 보고 익히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대화가 미궁으로 빠질 뻔했다.
파티에 초대된 아이들 중 한 아빠가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 왔는데 생긴 것은 허술해도 생각보다 맛있었다. 며칠 전 가게에서 산 번지르르했던 시누이 생일 케이크는 엄청나게 짜고 달아 충격적으로 맛이 없었는데 집에서 직접 구운 소박하지만 맛있는 케이크를 먹으니 어깨가 절로 들썩 거린다.
한국에서 맛있는 케이크를 추켜 세울 때는 "하나도 안 달고 맛있다!"라고 하는 거라니 신기해한다. 좋은 재료를 쓰고 각 재료의 풍미를 잘 살리면 딱히 인위적으로 설탕범벅을 만들지 않고도 훌륭한 맛이 나기 마련이라니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다.
생일 파티에 초대된 아이들을 위한 답례품 구디백은 원래 파티 끝나고 아이들이 집에 가기 전에 손에 하나씩 들려줘야 하는 법인데, 파티 시작도 하기 전에 생일자가 다 나눠주는 바람에 그 안에 든 엄청난 소음을 유발하는 피리를 다들 하나씩 불고 있다. 내 고막이 오늘 고생 좀 한다. 아직 아장아장 걷는 기저귀 찬 꼬맹이가 안에 든 젤리를 다 뜯어 바닥에 들이붓고 주스를 쏟고 난리법석이지만 내가 주최하는 파티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생일자의 아빠는 캐나다에 박사과정으로 왔다가 고국의 정치적 상황과 여러 가지 이슈를 이유로 이래저래 눌러앉아 이민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죄다 내 기준으로 치면 엄청난 고학력자들이다. 인재유출이 가속화되고 고급인력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는 걸 거부하다 보면 자국에 남은 사람들은 더 절망스러운 상황에 처해질 텐데 싶어 씁쓸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