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길 건너에 사는 캐나다 정착한 지 10년 차라는 영국인 부부와 저녁을 같이 했다. 웬만큼 가까운 지인이나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먼저 손을 내미는 식사가 아니면 이스트 넣어서 밀가루 반죽부터 하는 홈메이드 피자를 메뉴로 선정하지 않는다. 미리 최소 서너 시간 전에는 밀가루를 치대고 반죽이 부풀길 기다리고 모차렐라 치즈를 강판에 갈고 이것저것 토핑을 준비하고 하는 작업이다 보니 귀한 손님 대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손님을 초대하면 남편이 바빠진다. 시키지도 않은 화장실 청소뿐만 아니라 알아서 척척 재활용품도 정리해서 밖에 내놓고 음식물 쓰레기도 비우고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쌓아놓던 온갖 정체 모를 것들도 제자리를 찾아 집안이 오랜만에 티 나게 깨끗해지는 것이 너무 좋아서 손님 초대=대청소 공식이 어느 정도 불문율이 되어 버렸다.
이틀 전 이케아에서 사놓고 미루고 미룰 조짐이 보이던 의자조립도 아침 겸 점심 먹자마자 큰아이와 남편이 같이 뚝딱 조립해서 손님들 앉을 의자도 준비했고, 이제 7학년 된 큰아이가 설명서보고 혼자 의자조립 다 했다고 뿌듯한 얼굴로 대신 자랑하는 남편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하다 보니 어느덧 반가운 앞집부부가 양손 가득 맥주를 들고 왔다.
앞집 부부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집 엄마가 매번 등굣길 버스 정류장에서 남편과 만나다 보니 마침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라 남편과 먼저 안면을 트고 인사하며 수다 떠는 사이가 되었다. 성격 좋고 서글서글한 그 아이 엄마는 내가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고 날씨도 너무 혹독하게 추운데 밖에 돌아다니기도 힘들고, 집안에서 혼자 힘들겠다고 언제든지 차 한잔 하자고 찾아오라고 남편을 통해 나한테 오픈 인비테이션을 준 상태였는데 그렇다고 진짜 둘째 딸 손잡고 현관문 두드릴 줄 짐작이나 했겠나 싶다. 올해 들어 제일 미친 짓이 한 번도 마주친 적도 없는 타인의 집에 한 다리 건너 잠정적 초대받았다고, 그렇게 선약도 없이 진짜 쳐들어가서 신나게 수다 떨고 차도 얻어 마시고 친분을 쌓게 된 일이다.
망설이지 말고 저지르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건너편 이웃집 여자는 올해 내게 들이닥칠 행운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큰 복이 아닐까 한다. 프랑스어 공부한다고 이제 문장 몇 개 외우고 동사 변형 외우고 하는 중인데 어쩜 이리도 내 귀에 참 듣기 좋은 영국 억양에 수준급 프랑스어를 하고 일본에서 5년이나 ESL영어수업 경력도 있다니 말도 잘 통하고, 앞으로 내 어학 공부에 도움을 주겠다고 먼저 신나 하고 미술관 가는 걸 좋아하며 직접 유화를 멋들어지게 그려서 집안 여기저기 걸어 놓은 게 취향까지 맞아떨어진다. 나이까지 76년생 동갑이다. 적어도 10년은 어려 보인다고 내 나이처럼 안 보인다고 호들갑 떨며 깜짝 놀라기까지 하니 이쯤 되면 내 맘에 꼭 드는 이상적인 동네친구가 아닌가.
나의 남편과 그녀의 남편이 처음으로 만나 십년지기 절친처럼 어색한 정적 하나도 없이 그렇게 수다를 떨지 상상도 못 했다. 내 남편이 그저 조용한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말상대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조용했었나 보다 생각하니 눈이 좀 시큰해졌다. 서로 상대방 배우자 어떻게 만났는지 신나게 얘기하는 남편에 귀 기울이며 이 사람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해도 사람 바꿔 가며 하면 여전히 재밌다.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마이크 잡고 청중을 웃기고 반응을 보며 같이 재미를 느끼는 코미디언이 된 것 같다. 모처럼 들썩들썩 아이들은 티브이 화면으로 연결된 비디오게임으로 다트도 던지고 술집에서 어른들이 맥주 한두 잔 마시고 할 법한 게임을 하며 잘 어울리고 큰 소리로 떠들고 웃고 어른들도 맥주 마시면서 음주 운전 걱정 없고 비싼 택시 타야 하나, 술값은 누가 내나, 집에는 어떻게 갈까 하는 고민 없이 신나게 웃고 떠들고 나니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