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다. 첫 끼니로 냉장고에 남은 밥과 그 전날 저녁으로 먹고 남은 감자 짜글이를 데워 먹고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나니 이제 시야가 깨끗해진다. 샌드위치를 고의로 버린 딸이랑 냉전 중이라 둘째 딸 도시락을 4번 정도 안 싸려고 했는데 첫날은 식빵에 잼을 바르고 햄과 치즈만 넣은 내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걸 본인 점심으로 가지고 갔고 오늘은 스키장으로 현장학습 가는 터라 새벽에 많이 만들어 둔 삼각김밥을 가지고 가도 좋다고 '허락'을 해 둔 상태였다.
그렇게 산더미처럼 삼각김밥을 만들어 두었는데 하나도 없다니! 만든 사람도 하나 먹어보라고 한 개쯤은 남겨 두었을 줄 알았는데 설거지꺼리만 잔뜩 개수대에 담긴 걸 보니 좀 씁쓸하다. 이제부터라도 마지막 한 개는 물어보고 먹던가 아니면 꼭 엄마 몫으로 하나쯤은 남겨두라고 교육을 좀 시켜야겠다.
날씨가 미쳤다. 이런 날은 날씨가 아까워서라도 바깥에서 시간을 좀 보내야 하는데 이렇게 청명하고 좋은 날씨와 최고기온 영하 10도의 조합은 아직도 어색하다. 날씨는 창밖으로 보는 걸로 만족하고 내일과 모레 양 이틀간 또 학교를 가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쿠키를 굽기로 한다.
이제는 돌아가신 시아버지께서 몇 해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 주신 1963년도 출간된 베티크로커 쿠키북 레시피를 뒤적거리다 보니 피넛버터 쿠키가 제일 만만해 보인다. 마침 재료도 있고 하니 이걸로 낙점. 베이킹 소다와 베이킹파우더를 제외 하면 재료는 단 4가지. 계란 1개. 피넛버터, 쇼트닝(대신 마가린), 설탕(갈색설탕 1/2컵+흰 설탕 1/2컵)! 앗 밀가루를 빼먹으면 안 되지.. 재료는 5가지로 정정!
빈티지 쿠키 레시피이다 보니 죄다 쇼트닝이 들어간다. 쇼트닝... 돼지기름 아닌가. 예전 짜장면이 그렇게 맛있었던 이유는 돼지기름 쇼트닝으로 재료를 볶으니 그렇게 고소하고 달고 기름지고 맛이 없을 수가 없는 거였다고 자부한다. 쇼트닝 대신 마가린을 쓰기로 하고 재료를 꺼내 준비한다.
계란 1개를 잘 풀고 설탕을 넣어 크림 상태로 만든 후 마가린과 피넛버터를 넣고 잘 섞은 도우에 밀가루를 넣고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12개 동그란 덩어리를 넓적한 베이킹시트에 간격을 두고 올리고 포크로 살짝 눌러 모양을 잡아 준 후 오븐에서 14분! 집 안 가득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칼로리 계산을 잠시 해 보자면 피넛버터, 마가린 합쳐서 1컵, 1컵은 240ml, 지방 1그램당 9칼로리. 밀가루 1컵+1/4컵 약 300그램 탄수화물 1그램당 4칼로리. 계란 1개 약 70칼로리. 쿠키 12개면 개당 칼로리는... 흠.................... 쿠키 1개 다 먹었다간 밥 한 공기 칼로리를 훨씬 웃도는 군. 활동량 많은 아이들 주고 나는 반 개 정도만 먹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정신을 차리니 벌써 한 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들 4형제를 키운 시아버지는 남편이 어렸을 때 일요일이면 늘 쿠키를 구워 냉동실에 얼려 두셨다고 한다. 먹는 입도 많고 하니 밖에서 사 먹는 간식 대신 이렇게 아빠표 쿠키를 대량 생산해 일주일 내내 도시락에도 넣고 방과 후 주전부리로도 꺼내놓고 하셨나 보다.
몇 년 전 대장암으로 돌아가신 남편의 둘째 형 결혼식장에 각자 집에서 가져온 쿠키로 꾸며 놓은 쿠키 뷔페가 있었다. 그중 남편이 자주 구워서 이미 익숙한 스니커두들 쿠키를 제일 맛있게 먹었는데 그 쿠키를 직접 구워 가져 온 분이 시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때 시아버지가 구운 줄 모르고 계피향 가득한 스니커두들이 제일 맛있었다고 해서 나도 모르게 시아버지를 흐뭇하게 했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음식으로, 향으로, 맛으로 누군가를, 또 어딘가를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