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열흘 넘게 장을 보러 가지 않았다. 클릭만 하면 몇 시간 안에 당일배송되던 생활에서 벗어나 직접 배낭을 메고 걸어서 가거나 차를 구매하기 전까지 잠시 셋째 형님의 세컨드 트럭을 빌려 타고 있는 남편이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보기는 시간이 늦었거나 바깥날씨가 너무 춥거나 하면 이래저래 참 귀찮은 일이 된다. 4리터짜리 우유를 지난번 장 봤을 때 2통이나 사놓은 덕에 일단 우유는 아직 충분하고 시리얼, 계란도 몇 개 남아있지만 필요한 신선채소가 다 떨어졌다.
장바구니 물가는 인플레이션과 겨울이라는 계절적 요인을 동시에 직격탄으로 맞아 애호박, 쪽파, 시금치 등등 자주 쓰는 채소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기에 아마 저번 장보기에서도 신선 채소는 들었다 놨다 하며 망설이다 별로 사지 않았던 탓에 신선한 채소가 너무 아쉽다. 한식과 현지식을 겸하고 있는 밥상이다 보니 남은 식재료 조합이 참 애매할 때가 있다. 된장찌개에 셀러리나 당근을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쌀은 넘치게 많은데 식빵이 하나도 없고 또 쌀밥에 어울릴만한 반찬거리도 냉장고 속 재료로 장만하지 못할 때는 도시락 싸기랑 가족 식사 준비가 참 난감하다. 그나마 다행인가 저번 주 내도록 학교 가는 날 보다 안 가는 날이 더 많아서 도시락 싸는 고민을 좀 내려놨기에 망정이지 매번 이런 식이면 초보 전업주부 고난도 이런 고 난이도 고난이 없다.
주말 내내 냉장고 파먹기.
토요일 오전은 자느라 건너 띄고 애들은 시리얼.
오후 첫 끼니는 냉동 새우와 계란 쪽파 조합 새우볶음밥.
저녁은 딱딱해서 아무도 먹고 싶어 하지 않아 냉장고에 일주일 내내 굴러 다니던 콩조림과 삼 일 전 먹고 남은 카레+냉동 치킨까스 그리고 해동한 냉동밥.
일요일 오전 자느라 넘기고 애들은 시리얼.
오후 첫 끼니는 냉동실에서 하도 오래 묵어서 언제 사둔건지 기억도 안 나고 성애가 끼어서 참 먹기 싫은 비주얼이지만 기름에 튀겨 심폐소생술 거친 치킨너겟+양상추+허니 머스터드+체다치즈 조합의 토르티야랩
점심 먹고 나니 저녁은 뭘 먹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역시 저녁 고민은 점심 먹으면서!
점심 먹고 각자 전자기기 한 개씩 품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중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2시 30분이다. 이 시간이면 어디 준비해서 나가기도 의욕이 나지 않는다. 그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눈치게임! 먼저 어디 가자, 뭐 하자 제안 하지 않고 버틴다. 사실 나는 조용히 집에 있고 싶은데 벌써 삼일째 두문불출 집안에 있다 보니 개 산책 시키듯이 애들을 데리고 어디라도 나가야 하는 압박감이 느껴지지만 집 밖은 최고 온도 영하 15도, 이불 밖은 위험해!
오늘 쫄린 사람은 내가 아닌 남편, 좀 귀찮은 얼굴로 오늘 뭐 할 거야 뭐 하고 싶은 거 있어하고 먼저 물어 온다. 이 눈치게임에서 이겼다는 승리감에 고취되기 전에 일단 얼굴 표정을 가다듬고 뻔뻔하게 그의 생각을 묻는다. 정말 부담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남편을 구제해 주기로 한다.
"밖에 많이 춥고 지금 시간도 애매하니, 오늘 그냥 집에서 조용히 빨래나 하고 각자 알아서 시간 보내자!"
말해버렸다. 후련하다. 고개를 왼쪽으로 15도쯤 기울이고 양쪽 어깨 동시에 씰룩해 준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꼭 주말마다 어디 가야 되나.
오후 3시부터 저녁을 준비한다. 새로 밥을 하고 지하실 냉장고까지 뒤지니 당근 세 개와 오이 그리고 유통기한이 무려 2024년이라 더 의심스럽고 딱히 선호하지도, 먹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지만 혹시나 정말 필요할까 봐 사다둔 단무지 그리고 얼려놓은 사각어묵 그리고 계란의 조합으로 김밥을 싸기로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