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해야 한다. 어디라도 가야 한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제 주말 지나고 나면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간다. 아이들이 스프링브레이크 동안 뭘 했는지 선생님이 질문할 게 뻔한데 "집에 그냥 계속 있었는데요" 이러면 서로 민망할 테다.
솔직히 집에 계속 있었던 건 사실이다. 돌이켜보니 딱히 이야기할만한 소재가 하나도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과자 굽고 빵 굽고 적당히 방치하고 알아서 살아남고 서로 으르렁대기도 하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가족여행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봄방학 캠프에 참여한 것도 아니며 하나 못해 집 근처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나 그리고 딱히 별반 다르지 않던 앞집 그녀, 고심 끝에 RAM 로열앨버타뮤지엄에 가기로 했다.
아침 10시 30분에 도시락 싸가지고 만나기로 하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도시락을 준비했다. 어제 남편이 같은 학교 식품 전공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열심히 실습한 베이글을 두 봉지 사 온 덕에 집에 빵이 넘쳐 난다.
6개들이 못난이 베이글이 1.99달러. 미친 가격이다. 미래의 제과제빵 기능사들을 응원하며 못난이 베이글을 그럴듯해 보이는 샌드위치로 탈바꿈시키며 혼자 흐뭇해했다. 왠지 도시락 싸서 가자는 약속을 잊었을 거 같은 앞집 그녀 몫까지 넉넉히 준비하고 끓여서 식힌 보리차를 담아 버스정류장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일행에 합류했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단체로 온 팀이 많이 보였다. 아마 봄방학캠프 팀인 듯하다. 피곤이 더덕더덕 묻어나는 귀찮은 얼굴로 짜증스레 큰 소리로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고 있는 인솔자가 몇 명 보여서 흠칫했다. 믿고 아이들을 맡긴 학부모가 이 광경을 본다면 좀 껄끄러울 테다. 어쨌든 내가 오지랖 떨 상황은 아닌 듯 하지만 그 인솔자와 눈은 한 번 맞췄다. 여기 보는 눈 많거든요. 애들 앞이니 표정관리 좀 더 잘하시지요라는 나의 소리 없는 외침을 그분들이 알아들었길 바라며 그녀와 나는 구린 표정의 인솔자를 두고 소곤소곤 뒷담화를 했다.
앞집 그녀, 과일쫀드기 세개와 두툼한 지갑만 가지고 왔다. 아이들 하나씩 주려고 그랬나보다. 한입 뺏어 먹어보니 당이 확 차 오르며 제법 맛도 있다. 그녀는 내 베이글 샌드위치 먹어야 할까봐 떨고 있는 아들에게 치즈한장만 들어가 있는 박물관표 샌드위치 하나 사주고 내 두툼한 샌드위치를 고마워 하며 맛있게 먹었다. 두꺼운 베이글을 씹어 먹기엔 임플란트 한 부실한 이가 신경쓰여 반쪽 남긴 내몫까지 신나게 더 먹어주니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웠다.
아이들 세 명. 나이 어린순 대로 가고 싶은 장소 먼저 고르기! 앞집아이가 뼈와 돌로 가득 찬 자연사박물관을 골랐다. 예전에 왔을 때 못 봤던 '생존게임'이 있어서 다섯 명 다 커다란 테이블형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며 어떤 상대와 짝짓기를 할 것인가 서식지를 옮길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선택지를 두고 고민을 하며 생존율을 높이는데 이득이 될 결정을 하는데, 나는 다섯 세대까지 번식한 후 멸종되는 처참한 결과를 맞았고 컴퓨터게임에 능숙한 아이들 셋은 두고두고 살아남아 자기들의 종자를 남기는 생존자들이 되었다.
열심히 나름 머리 굴려 이런저런 결정을 한 내가 게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아무 결정도 안 하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있었던 앞집 그녀 보다 더 빨리 멸종한 건 좀 부당하다. 하... 인생!
RAM에 온 적이 있지만 자연사 박물관에서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터라 인류사 전시실에는 처음 들어가 봤다. 뼈랑 돌도 좋지만 역시 사람들 살림살이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 세계의 공장 메이드 인 차이나 없던 시절 한 땀 한 땀 몇날 며칠, 심지어 몇 달 몇 년 걸려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들 구경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어울리는 재미에 4시간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