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하루종일 비가 오고 쌀쌀한 하루를 보냈다. 사람은 네 명 우산은 한 개! 3년 전쯤 2월에 우기에 접어든 베트남으로 배낭여행 간다고 사다 두곤 정작 한 번도 들고 가보진 못한 우비 두벌을 찾아 테이블 위에 올려 두니 제일 먼저 집을 나서는 첫째 아이가 우산을 챙겨 들고나갔다.
나야 딱히 비 오는 데 밖에 나갈 일이라곤 오후에 둘째 아이를 데리러 가는 것 밖에 없으니 당장 급한 건 없고 평소에 폭우가 아닌 정도는 방수 재킷정도만 입고 그냥 맞고 다니던 남편이야 딱히 우산을 아쉬워하지도 않으니 남은 건 딸아이와 나뿐이다.
성인용 우비를 입은 둘째 딸이 나도 우산 쓰고 싶은데 하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우산 사주마 하고 일단 달래서 학교에 보냈는데 우산 없이 방수재킷만 입은 아이들이 제법 많이 보이고 오히려 우산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아챘나 보다. 버스정류장에서 목을 빼며 버스를 기다리는데 웬만하면 평소에 걸어서 하교하던 터라 버스 타고 귀가하는 것으로도 즐거워한다. 우산 사달라는 말이 쏙 들어갔다.
판초형 비옷이다 보니 아직은 둘째 아이에게 너무 품이 넉넉하다. 몸에 딱 붙지 않아 펄렁거려서 불편하다고 구시렁거리기에 엄마가 너 아기 때 말이지 비 오는 날에 아기띠 하고 배낭도 메고 너랑 둘이서 비 안 맞고 걸어 다니려면 비옷이 이렇게 커야 했다고 얘기해 주니 귀담아듣는다. 답답해할까 봐 중간에 단추 하나 열어 놓으면 그 사이로 빼꼼히 밖을 내다보며 다리를 달랑달랑거리곤 했다고, 단추 열린 사이로 새우깡 한 개씩 넣어주면 그거 잡으려고 통통한 손을 꼼지락거리며 뻗는 게 참 귀여웠다고 말해주었다.
본인이 아기 때 엄마한테 안겨서 쓰던걸 지금은 키가 커져서 혼자 입고 다닌다고 생각하고 뿌듯해하는 듯해서 굳이 그때 쓰던 추억의 비옷은 낡고 오래돼서 버리고 왔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쓰는 물건에 개인적 서사가 더해지면 애착이 형성된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선택지가 없어서 억지로 입어야 하는 비옷이기보다는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 서려있고 잃어버리기 싫어서 한 번 더 살피는 애착 비옷이 됐으면 좋겠다. 모든 물건이 애착과 애정, 그리고 서사가 켜켜이 묻어 있어 도저히 못 버리고 평생을 지니고 있다던가 이 정도까지는 곤란하겠지만 덜렁거리며 이것저것 잘 잃어버리는 아이가 좀 더 자기 꺼 잘 챙기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데 도움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MSG 한 스푼씩 섞은 이야기쯤이야 해 줄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