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 알파벳 타일 7개를 렌덤으로 꺼내서 영어단어를 만들고 각 알파벳마다 붙어 있는 포인트와 단어가 길어지면 얻을 수 있는 게임 보드위 특별 보너스 점수를 합산해서 점수를 내는 스크래블 보드게임은 한 번 시작하면 적어도 1시간 이상 걸리고 아무리 사전을 뒤적거리면서 한다 해도 기본 영단어가 부실하면 시작조차 하기 힘들다.
캐나다인 남편의 타일 뽑기 운이 지지리도 없었을 때 처음 내가 한 번 이기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 이후 한동안 거의 밤마다 한판 붙자고 치근덕거리며 남편을 귀찮게 하기도 했었는데 웬만하면 나의 도전을 받아주던 끝에 지금은 설렁설렁하다간 지겠다 싶어서 두 단어 짜리로 치사하게 점수를 올리기도 하는 스크래블 플레이 바닥의 바닥까지 다 까보인 상태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상한 만족감을 얻곤 한다.
남편을 그렇게 치사하다고 욕하면서 음기 양기 할 때 '기'는 영어로 Ki 또는 Qi, 피자를 Za라고도 한다며 스크래블 점수 인정 공식 단어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나도 여러 번 써먹었다. 일부러 돈 주고 스크래블 사전까지 사며 평소에 쓸 일 하나도 없는 희한한 단어들을 눈에 불을 켜고 외우기도 했다.
당신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해서 꼭 나를 이겨 먹어야겠냐고 남편을 약 올리지만영어가 모국어인 캐나다인 남편에게 한국인 아내와 하는 스크래블 게임이 솔직히 어떻게든 불리하다는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모른척 한다 . 이겨도 욕먹고 지면 더 굴욕적이니 이기고 치사빤쭈라 욕먹는 편을 택한 것이다.
아이들의 컴퓨터 사용시간을 두고 가족 회의한 끝에 컴퓨터로 게임을 하든지 말든지 상관 않고 아무 소리 하지 않는 시간은 하루 2시간으로 제한하고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하거나 학과 과정에 도움이 될 커리큘럼 문제집을 풀고 같이 책을 읽는 시간을 더 많이 갖기로 하고 오랜만에 큰 아이와 남편 그리고 나 셋이서 스크래블 게임을 시작했다.
두 명이서 게임을 할 때는 상대방 타일을 어떻게 사용해서 내 점수에 보탤 건지 미리 가늠하기도 하는데 세 명이서 게임을 하면 종 잡을 수가 없다. 딱 노리고 있던 구역을 날름 가져가기도 하고, 내가 뻗어나가야 할 공간을 떡하니 막기도 해서 열불 터지기도 하고 큰 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연결한 덕에, 남편이 역으로 곤란하게 되면 그게 또 그렇게 꼬숩다.
이제 7학년 2학기 째인 큰 아이는 부모의 도움이나 조언 없이 혼자 성인 2명과 스크래블 게임을 하며 진다고 속상해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한다. 정신적 성장을 이렇게 목도하게 되니 이제는 큰 아이에게 언제 처음 제대로 한 방 먹게 될까 은근히 기다려진다. 아직 남편을 이기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근소한 차로 3위를 차지한 큰 아이가 여차하면 곧 나를 이겨 먹을 태세라 다시 스크래블 사전을 훑어보며 전력을 재정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