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배는 딱 조롱박처럼 생겼다. 이제껏 한국 나주 배 먹던 입맛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맛이다. 배가 아니라 무 맛이다. 깍두기 담가야 할 채소 맛이다. 40대 중반을 넘기면서도 아직 한 번도 김치와 깍두기를 직접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이게 과일맛이 아니라 채소맛이라는 것을 혀가 느끼자마자 처음 드는 생각은 이건 김치 재료구나였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근처 시장에 약간 흠이 나서 상품 가치가 떨어진 나주배를 한 바구니씩 싸게 파는 아주머니를 알고 있어 종종 사다 나르곤 했다. 시원하고 달달한 배를 냉장고 가득 쟁여놓고 불고기 양념에도 갈아 넣고 너무 많아 처치 곤란해지면 주스로도 만들며 원 없이 먹어 댈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추억 속에서만 회상할 수 있다는 건 좀 씁쓸한 일이다.
한인마트에서 페트병에 담긴 갈아 만든 배 주스를 보고 반갑다고 집어드는 남편은 한 병에 한국돈으로 환산해 만원 가까이하는 가격 보고 슬그머니 제자리로 내려놓았다. 아직 우리가 이 정도로 절박하진 않다고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 배가 먹고 싶다고 사달라는 아이의 요구를 무시할 수만은 없어 주스 말고 진짜 배를 사 가자고 꼬드겼다.
그렇게 한가득 사온 조롱박처럼 생긴 이 동네 배, 맛없으면 뭐 생애 최초 깍두기를 이 눔들로 담가 버린다고 마음을 먹고 집에 와서 깎아 먹어 보니 처음 먹었을 때의 그 충격적인 무맛보다는 달달하니 먹을 만하다. 역시 기대감 제로에서 시작해야 반전의 미를 겪을 수 있다.
약간 겉면이 시들시들했는데 수분이 증발하면서 단맛이 응축되었나 보다. 아니면 이 동네 배도 제철이라는 게 있어서 과일이라고 분류될 만큼은 달아질 수 있는 건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페트병 배향 설탕물을 사지 않아 다행이라 여긴다.
불고기 양념에 배를 갈아 넣고 싶은데 불고기감으로 얇게 잘라서 파는 소고기를 근처에서 쉽게 살 수가 없다. 덩어리 고기를 사서 집에서 내가 자르려니 엄두가 안 나서 아직은 내가 한국식 불고기 못 먹어 환장할 정도는 아니 구나 싶다. 뭐든 이렇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지 하는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나간다.
바뀐 환경 탓만 할 것이 아니라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 나가야 몸도 마음도 추려 나갈 수 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니까 다른걸 탓할게 아니라 소소하게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내가 맞춰가야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