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이라는 직업에 있어 큰 장점 중 한 가지는 평일에도 쉴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휴일과 주말에 근무해야 하는 단점도 있지만 왠지 평일에 쉴 때면 요즘은 주말보다 더 행복하고 여유롭다.
17년여 동안 내근 근무를 하다 처음에 외근 근무를 하면서 평일에 쉴 때면 항상 오전에 집 앞 카페로 가서 창밖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유를 즐기곤 했다. 그때는 그게 나름의 여유였고 즐거웠다. 그래서 내가 평일에 쉰다는 것은 주말 이상의 이유가 있다.
그래서 어제도 평일이지만 쉴 수 있었다. 어제는 전에 근무했던 경찰청을 다녀왔다. 점심 약속 때문이었다. 동료와 점심을 먹고 바로 지하철을 타고 오는 것보다 주변을 혼자 걷고 싶었다. 옛 추억들이 많은 곳이라 더욱이나 그랬다. 나는 대학도 경찰청 주변에서 다녔던 터라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지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서울역까지 걸어오는 길이었다.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이 있는 공원 옆으로는 ‘염천교 수제화 거리’가 있다. 내가 경찰청에 처음 근무했던 2003년부터 있었으니 최소 몇십 년은 된 구두 전문점들이다.
그 옆을 지나다 오래전 그곳에서 샀던 아버지의 키높이 구두가 생각났다. 어느덧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지도 10년이 되었다. 그런데 가끔 아버지의 추억이 있는 물건이나 장소를 가면 생각나곤 한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생신을 맞아 선물로 수제 구두를 샀었다. 그것도 키높이 구두로 말이다. 언제부턴가 아버지께서 왜소해지는 모습이 싫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산 키높이 구두도 아버지를 위한 선물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싶다.
사실 당시에도 여든의 나이가 넘어 키높이 구두를 신기에는 당신께서 불편하셨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스러운 생각이었다.
아버지 생신 선물로 사드렸던 키높이 구두(10년이 지난 뒤 오늘 사진을 다시 찾아봤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이순신 장군보다도 키가 큰(?)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한편에 있던 동상만큼이나 크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아니었다. 당시 아버지는 직업 군인으로 40여 년을 군 생활하시고 퇴직하신 후였다. 그래서 더욱이나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어려서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지금 생각해 봐도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나이가 들면서 점점 왜소해지는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키가 크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해에는 키가 165cm도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 170cm가 훌쩍 넘는 키였는데 말이다. 그때 아버지께서 자신의 뼈를 깎아 내 무릎에 붙여주신 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명절이나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가족묘’ 이야기를 하시곤 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무척 어렸었다. 그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괜히 눈물이 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씀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화장’을 하고 가족 봉안당을 만들어 그곳에 함께 모시자는 아버지의 제안이 처음에는 우리 가족 어느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었다. 이제는 서로가 그런 부분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곤 한다. 이 또한 아버지께서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결과였던 것 같다.
어제 오후는 꽤 더운 날씨였다. 그러나 금방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수제화 가게 주변에서 30여 분을 머무르다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아버지, 막내아들입니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큰 분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어디에서도 아버지를 볼 수가 없네요. 그때 제가 아버지께 키높이 구두를 사 드렸던 건 잘못인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제가 어려서 아버지께서 왜소해지는 게 싫어서 그랬던 거니 용서해 주세요.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