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간단한 문장입니다. 읽는 순간,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이러해야 한다, 저러해야 한다 하는 큰 잔소리 없이 가만히 내 안의 나를 일으켜 세우는 문장입니다. 처음 볼 때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중에서
긴 시의 문장 중에서 유달리 그 문장이 눈에 박혀서
삶이 때로는 나를 속여 내가 엎어질 때,
이렇게 사는 게 도대체 맞는 건가 투정하고 싶을 때,
의욕이 가라앉아 열정이 더 이상 내게 속한 단어가 아닌 것 같을 때,
화내는 것조차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 일이라 그것조차 하기 싫을 때,
이상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것 같은 때,
죽도록 노력했지만 그 노력이 닿지 않아 패배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알면서 멀쩡한 척 다시 그것을 해야 할 때,
실패해봐서, 다시 시작할 때 그 실패를 떠올리며 두려워질 때,
진정성이 의심받을 때 혹은 의심할 때,
역시 타인은 내가 아니라서 내 마음이 하찮아질 때,
최선인 줄 알고 살았던 모든 것이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때,
백 보를 죽어라 힘겹게 걷고 있는 나를 누군가는 쉽게 앞질러 갈 때,
어느 순간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이 철저히 혼자구나 싶을 때,
자존감은 무너지고 자존심만 강해져 못나지는 순간을 목격할 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다만 억지로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성과 앞에서 초라해질 때,
아끼는 사람과의 끝을 보게 될 때,
사라져 가는 순간의 아스라함이 안타깝지만 무력할 때,
누군가가 등 떠민 듯, 낭떠러지 앞이구나 싶을 때,
그저 모든 것이 위기이다 싶을 때,
인생무상 마냥 공허해질 때,
이러한 때마다 무작정 되뇌는 말이 되었습니다.
나를 떠밀어내는 세찬 바람인지, 감싸주는 듯 포근한 바람인지 모르지만 그러한 때가 오면 '아, 바람이 부는구나. 살아야 하는 바람인가 보다.' 하면서요.
한편, 어느 해 3월 초에 봄눈이 내렸던 날, 갔던 낙산해수욕장의 백사장에 쌓인 눈이 신기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언급한 여러 순간이 겹친 때였는데, 눈 내린 바닷가는 내게 처음 보는 풍경이었습니다. 바닷바람도 심상치 않아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 하는 날. 모래사장에 쌓인 눈은 그 바람결에 따라 눈이 쌓여있었습니다.
어쩐지, 카페에서 그 풍경을 보는 것보다 세찬 바람을 바람을 맞으며 커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푹푹 빠지는 모래와 쌓인 눈을 밟으며 힘겹게 걸었습니다. 상상한 것보다 훨씬 낭만적이지도 우아하지도 않았습니다. 커피는 찬 바람에 금방 식었으니, 괜한 짓을 했다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러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부는 바람을 맞이하고 섰는데 폴 발레리가 왜 <해변의 묘지>에서 그 문장을 썼을지, 감히 알 듯했습니다.
삶이 내 뜻대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뿐더러, 보고 싶지 않아도 봐야 하고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것들이 천지인 세상에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광대처럼 나아가지 않을 수도 물러설 수도 없으니, 우리는 어찌 됐건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한편, 낙산해수욕장의 해변가에는 서툴고 세련되지 못했던 20대 초, 중, 후반의 삶의 궤적이 숨어있음을 기억하고 마음이 넉넉해졌습니다.
처음으로 마음을 들썩이게 했던 남자의 옆모습을 훔쳐보다가 또 그 마음이 들킬세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알아채 주길 바랬던 햇살 뜨겁던 20대 초반의 5월의 그 어느 때, 짓궂은 장난과 목이 쉬도록 토론하며 새벽에 동이 터올 때까지 술 마시며 객기 부리던 20대 중반의 어느 때, 잘 지내던 사람들 무리 속에서 타인의 짝사랑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해주던 20대 후반의 어느 뜨거운 여름밤.
그때 부는 바람에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기억들은 돌이켜보면 가슴 따뜻한 '바람'이었구나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아름답게 기억되는 순리가 여기도 있는 모양입니다.
또 간절한 희망을 담은 '~하기를 바람'의 동사도 있듯이, 부는 바람결에 마음을 얹어보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 내가 담대해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올해 받은 생일 축하 카드에 "앞으로도 적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겠지만 늘 그랬듯 현명하게 넘어보자."며 지금부터 30년도 늘 비뚤어짐 없는 응원을 보낸다는 친애하는 친구의 바람에 다시 한번, 살아야겠다 의지를 세워봅니다.
그러하니, 당신!!
바람이 불어도, 불지 않아도 올곧게 살아내시길.
역시 비뚤어짐 없는 응원을 보내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