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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Robin Dec 27. 2022

이재 이야기

13. 모티브(Motive)는 아무렇지 않게, 아무 곳에서나

*

   근래 2~3년 간의 겨울 중 기억에 남을 만큼 극심한 추위는 별로 없었다고 무방비하게 굴다가 이재는 요 며칠 지속되는 영하 10도 이하의 추위에 문득 예전 혹독했던 겨울을 떠올렸다.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에 있던 학교의 캠퍼스에서 이재에게 준 연구실은 그 학교가 처음 생길 당시에 올렸던, 그러니까 단열공사가 전혀 안 되어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그 해 겨울은 이재가 태어나서 겪은 겨울 중 가장 혹독했던 추위가 연일 계속되던 때(평균 기온이 영하 15도 정도)였다는 것이었다.

  서울 빌딩 사이에 부는 칼바람에 익숙하던 이재에게도 그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단열이 되지 않는 건물의 난방은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차가운 공기에 손은 곱고 그 손에 닿은 책장은 시린 얼음이었다. 점점 그 속에 앉아있다 보면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작은 담요, 발을 녹여줄 작은 난로, 전기 주전자를 하나씩 나르고 그 연구실에서 절대 두꺼운 외투도 벗지 않고 옹송거리며 책을 읽고 일을 했다. 웬만한 추위에는 끄덕 않던 이재에게 결국 살면서 처음으로 내의를 챙겨 입게 한 그 해의 추위와 그 연구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턱이 달달 떨리는 듯싶다.


   더 최악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으려면 전기 주전자의 물을 데워서 가져가야 했던 것이다. 화장실에서조차 따뜻한 물을 쓸 수 없다는 것은 혹독한 추위를 더 극심하게 겪게 하는 인권침해가 아닐까 중얼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해 겨울, 이재의 옷은 점점 아웃도어룩만이었다. 고어텍스의 기능을 히말라야가 아니라 학교의 낡은 건물에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추위와 혹독함에도 매일 그곳을 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편, 다시 연말이다.

   이재는 나이 한 살 더 먹는 건 차치하고 그냥 이 지긋지긋한 한 해를 잘 살았다 싶어 후련함이 더 크고 그래서 들뜨는 기간이기도 하다. 열심히 살았다 해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좋은 한 해였다 기억할 수 있는 건 시간이 훨씬 더 지나야 가능한 일이고 한 해, 무사히 잘 보낸 것만으로도 좋은 시기인 셈이다.


   괜히 새해에는 묵은해보다는 나을 듯한 대책 없는 낙관이 뻗쳐나가더라도 용인되는 연말의 감상은 이재가 누려온 작은 행복 중 하나이다.


  이재는 1년 계획을 세세하게 잡는 편은 아니다. 작심삼일이 이재만 피해 갈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그녀 자신도 잘 파악하는 것이니 그런 만용은 잘 부리지 않는다.

  혹자는 작심삼일을 100번만 하면 다 채우는 것이라 했지만 같은 일을 100번씩이나 반복할 정도의 무던한 열정이 있을 리 만무하다.


  다만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때마다 그 해를 버텨내는 단어 하나를 정하는데 예를 들면 '변화', '도전', '여유', '휴식', '신독', '관용' 이런 식이다.

   즉 살아온 방향을 생각하며 그때 부족했던 혹은 더 필요한 태도를 정한다라고 보면 된다.  


   그런 태도를 나타내는 단어를 스스로 정하고 일기에나 다른 어디에도 글자로 써서 적어놓으면 이재는 삶이 흔들린다 여겨질 때마다 그 작은 단어가 버팀목이 되는 것을 경험해 왔다.


  '변화'가 필요하다 여겨질 때는 삶이 너무 안정되다 못해 나태해지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때였다. 제로 그 해에 많은 변화를 자의와 타의에 의해 경험했고 삶에 대해 좀 더 전향적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올해는 '여유'였다.

  돈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고 이재 스스로가 정한 바대로 움직이는 것이 과연 괜찮은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의심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전의 안정적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미련 한 뭉텅이를 끌어안고서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여유'라는 태도는 그럴 때마다 달려드는 개를 저쪽으로 밀쳐버리듯 이재를 지켜주었다. 데생을 배우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도 그 '여유'이며 실제로 기초를 깨우치면서 생각보다 더 큰 마음속 '여유의 공간'이 생겨났다.



  살벌하고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먼 그곳을 열심히 다니게 한 것은 '관용'이었다. 그해의 다짐은 어쩐지 관용이었는데 첫 시작부터 인내심을 시험하는 사건과 사고가 무던히도 많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연일이었으나 누군가를 위해, 신념을 지키기 위한 시간의 담금질도 결국은 '관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 '관용'은 겸허함도 배우게 했으니 이재로서는 얻은 게 훨씬 더 많은 해였다.

 

  그것들을 모티브(Motive)라고 하자.


  '움직이게 하다'의 의미를 지닌 라틴어 "motivum"에서 유래한 용어인데, 일반적으로 예술 창작 혹은 표현의 제작 동기(製作動機), 동인(動因), 원동력(原動力)을 뜻한다고 하니, 이재가 새해를 맞이하는 데에 아주 적절한 정의가 아닐까.

   원래는 창작과정에서 그 활동의 동기를 만들어 주는 사물 또는 예술적 착상에 있어서의 대상적 계기를 의미하지만 미술에서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작품을 창작하게 하는 대상이나 체험, 표현의 의도가 유발되는 테마나 소재를 가리키기도 하니,  새해에는 줄리앙도 비너스도 아라아스도 브루투스도 그녀의 모티브가 될 것이다.


  아직은 각이 진 아그립파를 여러 측면으로 돌아가며 그리는 중이지만 언젠가는 색채에도 손을 뻗게 될 것이다.



  여전히 밖은 춥다. 얼굴에 닿는 추운 바람을 맞으며 이재는 내년의 모티브는 "부여"라고 정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다시 자신에게 주는 기회, 상상력을 더할 기회, 더 배우고 깨우칠 기회, 사랑을 베풀 기회 등의  "부여".

 

  사랑하는 모든 이의 이 연말의 시간이 따뜻하기를. 또한 새해에도 당신들을 비어짐 없이 곧게 응원한다는 것을.

 새해에는 그들이 이재에게 더 많은 시간을 '부여'하실 수 있도록 건강하시길.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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