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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Robin Dec 23. 2022

이재 이야기

12. 큐비즘(Cubisme) 같이 쏟아지는 편린들

*

  이재는 얼마 동안 삶의 귀퉁이들이 조금씩 금이 가고 무너지는 것을 보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무너진 잔해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보고 말았다. 자신의 한계를 명백한 증거를 통해 확인하는 것만큼 잔인하는 것이 또 있을까? 바라고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채로 버려지는 것을 볼 때마다 이재는 가슴이 온통 폐허가 되는 듯하다. 


   그래서 이재는 빨강 립스틱으로 하이라이트를 주고 자기 위안을 하며 폐허가 된 자신을 추스르는 중이다. 마치 금발의 트랄라처럼. 

   

   문득 삶은 엉망이고 자신은 넝마가 될지라도 빨강 립스틱을 바르고 브루클린을 걷던 그녀가 떠올랐다.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봤던 신문 한쪽 귀퉁이에 있던 대한극장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영화 광고의 포스터 속의 그녀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강렬했고 그 참혹한 장면에 덧입혀지는 너무나 서정적인 바이올린 연주의 OST, "A love Idea"이 주는 아이러니함은 삶이 가진 다면성 같아서 잔인하면서 아름다웠다. 


   때때로 이재는 삶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금발의 트랄라를 떠올린다. 가슴은 무너지지만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끌어모으려 한다. 무너진 모서리를 다시 채우려는 데에 생각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다시 믿기 위해서 그렇다. 



    그날, 이재는 아이러니의 집합체였다. 화장을 최대한 곱게, 빨강 립스틱으로 그려진 입술은 선명하고 붉디붉게, 표정도 그만큼이나 화사하다. 머리도 옷도 모두 단정하다. 아무도 그녀의 그림자를 알아채지 못했으니 그녀의 전략은 성공적이다. 그렇게 꾸미고 온 이재를 보던 데생 강사는 아무 말이 없다. 


   다시 각진 아그립파 앞이다. 첫날 만났던 그를 속이 뭉개진 이재가 재회했다. 


   데생 강사가 먼저 2절지의 중앙을 "정하는" 방법부터 설명을 한다. 2절지의 중앙을 찾는 게 아니라 정하는 방법이다. 

   세로 방향의 위쪽은 1cm 정도 표시를 하고 아래쪽은 2cm 정도 표시를 한 다음, 가로 방향의 왼쪽에도 1cm, 오른쪽에도 1cm 표시를 한다. 4B 연필을 잣대로 각각 표시한 곳으로부터 잰 다음 겹치는 부분의 가운데를 짐작하여 중앙을 "정한다."

  뭔가 어설픈 듯한데 나름 합리적인 방법 같다. 과학적으로 혹은 수학적으로 종이의 정 가운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하는 그림의 중앙이라는 면에서 꽤 능동적이다. 

  

   그 자리에 "+"를 해둔다. 


   그리고 이재의 시선에 맞춰 오른손을 길게 뻗어 연필을 든다. 오른손을 들었으니, 왼쪽 눈을 감는다. 오른쪽 눈과 오른손으로 아그립파의 중앙을 찾는다. 그 부분을 좀 전에 "+" 한 데에 그린다. 그것을 기준으로 두상을, 목을, 그리고 가슴 부위를 그린다. 


   처음부터 정확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대강 잡고 명암도 대강 넣고 점점 형태를 잡아 나간다. 여기서부터는 이재가 앉아서 본 시각에서 맞는 형태가 나와야 한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이재는 가운데를 "정하는" 것과 점차적으로 형태를 잡아 나가는 것이라는 말에 마음을 뺏겼다. 자신이 정하면 되는 것들과 헝클어지고 엉망인 것들을 다시 돋우고 다듬어서 형태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모서리 한 부분이 부서졌다. 한계를 발견했고 확인했다. 그래서 가슴이 걷어 차인 것처럼 아프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우습기조차 하다. 속은 그럴지라도 겉은 멀쩡한 척하며 자기만족을 한다.


   그건 이재가 바라보고 씁쓸해하는 하나의 단면이었을 뿐이다. 자신이 정한 단면이다. 그렇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단면을 더 크게 부각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재 자신이라는 점이다. 

  2절지에 그려지는 아그립파의 모습은 단면이지만 입체적으로 표현하여 보이지 않는 면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처럼 이재는 자신이 부각한 단면의 이면이 있음을 상상해 본다.


  그러니까 큐비즘(Cubisme), 즉 입체주의처럼 시점의 복수화하여 단면에 그려 넣는 것처럼 욕심낼 수는 없지만 보이는 것 외에 그 이면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재는 실패를 통해 처절하게 일깨워본다.


Pablo Picasso, <Girl before a Mirror> C. 1932, Oil on canvas 162.3 x 130.2 cm, MOMA


   큐비즘이 마티스가 브라크가 그린 <에스타크 풍경>이라는 연작을 보고 '조그만 입체(큐브)의 덩어리'라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 했다. 이재는 각진 아그립파도 조그만 큐브 덩어리 아닌가 싶었지만 시점의 복수화는 그것을 그리는 사람이 속으로 가지는 것일 뿐이니,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데생을 하면서 입술을 중간중간 물고 뭉개다 보니, 선명하던 입술은 약간 지워지고 번져있다. 그러면 또 어떠 한가. 


   집으로 가는 길, 오랜만에 'A Love Idea'를 찾아 반복해서 들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금발의 트랄라가 용기 내어 삶의 진창을 걸어갔듯이, 이재도 자신이 한 실패더미 속에서 용기를 발견할 수 있는 힘을 얻은 듯했다. 어디를 바라보느냐는 자신이 정하는 바이다. 

  2절지의 가운데는 자신이 정하는 것처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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