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위에 LED 조명이 붙은 작은 탁상 거울까지 놓여있다. 그리고 화장대에는 기초화장품이 나무박스에 자잘하게 놓여있다. 토너 패드, 토너, 앰플은 미백, 탄력, 보습 따위의 용도에 따른 서너 개, 크림 서너 개, 페이스 오일, 손톱 오일까지 이재가 나름의 순서대로 놔둔 기초화장품들. 가끔 이재는 자신이 화장품을 숟가락으로 떠먹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쓰고 많이 산다.
화장대의 넓은 서랍 안에는 메이크업 제품과 도구들이 가지런하게도 정리되어 있다. 지금은 많이 정리했지만 한 때 이재는 립스틱만 100개가 넘었다. 빨간색 립스틱만 서른 개 넘게 있었다. 하늘 아래 같은 핑크가 없다 하던가? 이재에게는 하늘 아래 같은 빨강이 없었을 뿐이다.
마음에 드는 빨강 립스틱을 사려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적도 있었고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이재는 결국 빨강 립스틱을 사서 황홀해했을 정도였다. 다른 화장을 많이 하지 않고 그 색 하나만 얼굴에 얹으면 세상을 향한 밝은 예의를 다한 느낌이었다. 많이 부지런할 필요는 없지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빨강 립스틱.
그때는 왜 그런지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이르고 보니, 이재는 그 빨강 립스틱은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다 똑같은 빨강일 테지만 그녀 자신만은 아는 그 작은 차이를 가진 빨강 계열들과 질감 같은 것. 그날 아침마다 무엇을 바를지 선택할 때만큼 신중하고 또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입술선을 따라 색을 채워 넣을 때의 그 고요함 같은 것들이 그 시절 이재에게는 꽤 큰 격려였다.
여하튼 이재가 그때나 지금이나 아끼지 않는 게 있다면 화장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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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球)를 그리던 이재에게 데생 강사가 지우개를 지우는 용도가 아닌 흰색을 칠하는 도구처럼 생각해 보라는 말이 떠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이라이트(Highlight)의 효과를 극적으로 만들어내는 도구로 지우개의 역할을 확대시켜 보라 이것인데, 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는 돌출 부분에 써야 할 테고 여러 손길이 아닌 단번에 해내야 효과가 더 제대로일 것이다.
그날 이재가 손댄 하이라이트는 어중간했다. 손을 여러 번 대고 수정을 하다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어 있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가장 하이라이트일 장면에서 필름이 씹히거나 멈춰서 다시 돌아가서 또 보는데 이미 김이 새버린 것과 같은 그런 너절함 같았다.
그렇게 하이라이트는 제대로 쓰이지 않으면 너절해진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거울 속 이재의 손은 화장품을 순서대로 바르고 두드리고 하면서 바쁘다. 그림도 기초가 탄탄해야 하지만 화장도 기초화장이 탄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를 바르고 흡수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좋다고 더 많이 바르는 것도 안 된다.
피부에 파운데이션을 아주 얇게 바르기 위해 집중한다. 자칫 잘못하면 두꺼워지는 건 순간이다. 양 조절이 생명이고 그것을 돕는 것은 도구이다. 화장할 때 이재는 인간이 도구의 동물이라는 것을 여실히 깨닫는다. 그 화장대 서랍은 그러니까 메이크업 제품도 있지만 온갖 도구의 집합체라고 할까?
갖은 하이테크 기술이 담긴 그 미용도구들을 보자면 화장은 인간이 하는 가장 문명이 집중된 행위가 아닐까도 싶다.
그리고 피부에 얇게 얹은 파운데이션이 제대로 먹도록 패드를 부지런히 두드린다. 피부 화장은 어느 정도 완성이니, 이제 이목구비의 윤곽을 명확하게 한다. 눈썹 뼈와 미간 사이, 광대뼈 아래, 턱 밑 이런 부위에 피부색보다 좀 더 어두운 색으로 조절한다. 그리고 눈 화장을 하면서는 입체감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 작업을 마치고 나면 오늘 화장의 하이라이트는 어디에 둘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눈에 하이라이트를 줄 것인가, 입술에 둘 것인가. 오늘따라 빨강 립스틱이 생각났으니, 입술에 하이라이트를 두기로 한다. 눈은 최소한만으로 한다. 볼에 하는 블러셔도 한 듯 만 듯하게 한다. 이 모든 노력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인위적인 모든 것들 동원해 자연스럽게 보이려는 아이러니함이 또한 화장이다.
가지고 있던 빨강 립스틱 중에 더 분위기 있어 보이는 이름하여 "Pure Color Love Lipstick 310 BAR RED"를 선택한다. 어느 분이 늘 이재를 생각하면 레드 립이 생각난다며 선물해 준 립스틱이다. 입술이 잘 그려졌다. 기분이 확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화장을 하는 이재에게 지우개는 빨강 립스틱이었다.
문득 데생의 원리가 화장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본 도형 갖고 이러는데 아그립파니, 줄리앙이니, 비너스니 하는 얼굴이 있는 석고상을 데생하면 화장은 더 입체적이 될까?
언젠가 정육면체를 그리고 있던 이재 옆에서 석고상 데생을 하던 이재보다 진도가 앞선 사람들에게 강사가 하던 '얼굴에 화장한다 생각하고 석고상을 그려보라'라고 하던 말이 그 말인가 싶기도 하다. 어디에 시선을 두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강조를 하고 나머지는 아웃포커싱을 하라던 그 말은 화장에도 적용되는 말이니, 영 틀린 말은 아니겠구나 어슴프레 짐작을 해본다.
빨갛고 선명한 입술이 성공적인 이재는 그날 다른 곳에 시선이 더 흩어지지 않게 옷을 입고 집을 나선다. 날이 흐린 듯 눈이 내릴 듯 하니, 빨간 입술은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던 듯하다. 빨강 립스틱은 맑고 화창한 날보다 흐린 날이 더 어울린다. 가라앉는 그녀의 기분을 더 내려앉지 않도록 견디게 해 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