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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Robin Dec 14. 2022

이재 이야기

09. 시메트리(Symmetry)를 넘어

*

   달항아리의 완벽하지 않은 대칭에서 오는 리듬감이 주는 포근함에 이재는 며칠간 기분 좋게 허우적거린다.  이재는 다시 보고 싶은 마음과 꼭 당장 보러 가야 할 것 같은 조급함에 괜히 또 설렌다. 그 감정이 반가웠다. 그럴 때가 자신이 진정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한때 이재는 메마르고 고요하지만 바닥이 드러난 저수지 같거나 늙은 노인의 지루한 오후 4시 같은 기분으로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기에 설렘이 찾아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안다. 화도 슬픔도 기쁨도 흔한 신경질도 나지 않던 지루하고 또 지겨웠지만 사는 것만큼은 무던히도 성실하기만 했었다. 

  물속에 잠긴 것 같다고 이재는 일기에 쓰기도 했다. 상실이 있었고 그 뒤에 찾아온 것은 무감각과 무감정이었다. 그 상실의 크기는 무감각과 무감정의 크기와 비례했던 셈일까? 

  

  그래서 이재는 상실한 후에는 미친 듯이 울고 불고 그것을 오장육부가 쏟아지듯 세상 밖에 끄집어내는 시간이 충분히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지 못해서 속으로 파고드는 그 한기는 감각과 감정을 얼어붙게 하고 다시 온기가 돌게 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또는 그렇게 하기까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 이재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찾아오는 작은 설렘을 공들여 붙잡는다. 



   이재의 눈동자에 생동감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계기는 아주 사소한 궁금증이었다.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멈춘 할리우드 B급 스파이 영화의 후반부였던 듯 싶다. 남자 주인공이 일당백으로 테러로부터 뉴욕시를 지켜낸 뒤, 병원 입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자신의 연인이 찾아오고 서로의 안위를 무언으로 확인한 뒤, 남녀는 깊이 포옹하는 장면이었다. 

   

   흔하디 흔한 클리셰의 장면인데 여자배우를 꼭 껴안는 남자 배우에게 괜히 맺혔다. 그리고 이재는 그 남자 배우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찾아낸 온갖 것들을 읽고 머릿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때 이재는 무너진 두터운 둑 사이로, 감각과 색채가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건 남자 배우의 팬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호기심과 궁금함이 메말라버린 땅 위에 새싹이 돋아난 것 같은 생동감이 통통 튀어 오르는 것을 뜻한다. 이재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색이 돌아왔다.'



**

  슬픔의 대칭은 기쁨이 아니다. 슬픔의 대칭은 무감정이다. 기쁨의 대칭 또한 무감정이다. 사랑의 대칭 또한 무감정과 무감각이다. 미움이 될 수 없다. 차라리 무언가 밉기라도 하면 좋겠다 싶지만 그 미운 감정마저 사치스럽다 느끼던 때의 이재는 바스락거리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슬퍼하고 울분을 표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또 역시 그것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허락해야 한다고 이재는 굳게 생각한다. 온갖 감정들의 대칭점에 닿아서 영혼이 부서지기 전에 그러해야 한다고 이재보다 더 슬픈 상실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 


  달항아리를 만든 도공의 충만한 사랑에 기대서라도 그렇게 하라고 전하고 싶다. 



  시메트리(Symmetry)는 좌우 대칭, 혹은 상하로 동일한 형상의 한 짝을 뜻한다. 대칭을 너무 기계적으로 남용하면 경직감을 낳고 유기적인 생명감이 손상된다는 특성을 본다. 

  그 달항아리의 완벽하지 않는 대칭은 도공의 충만한 사랑과 유기적인 생명감으로 인한 포근함을 이재 스스로 느꼈음을, 궁금함과 호기심이 채워졌다. 따사로운 감각이다. 


  또한 이재는 데생을 하면서 무채색의 감각에 흠씬 빠져있음도 다시 생각해낸다. 


  무채색 특히, 검정은 색채일까? 

  같은 종이에 같은 4B연필로 그리는데 데생 강사의 색과 이재가 그리는 색이 차이가 난다. 그의 색은 푸른색이 도는 무채색이고 그녀의 색은 갈색 빛이 도는 무채색이다. 푸른색의 연필 색이 더 마음에 드는데 이재가 손을 댈수록 갈색이 돋는다. 예쁘지 않은 갈색톤이다. 

 

   이재의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제 색으로 흘러가는 모양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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