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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Robin Dec 12. 2022

이재 이야기

08. 모더니즘(Modernism)을 품은 

   이재는 나이가 든 바비를 떠올리는 동안 눈앞에 놓인 "구(球)" 그저 요요하다. 데생 강사가 빛을 쏘이고 이재의 위치에 와서 "구(球)"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본 후, 잠시 사라진다. 검은 배경과 놓은 탁자, 빛은 같은데 전혀 다른 시각적 자극이라 눈을 지그시 떠본다. 


   '완벽하게 동그란 "구(球)"로구나. ' 


  손을 들어 2절지에 무작정 동그랗게 형태를 따라가 본다. 어찌해도 오른편은 살짝 타원이다. 지우개로 그 부근을 계속 지워대다 보니, 이제 종이마저 필 지경이다. 어차피 명암을 넣기 시작하면 다시 달라질 형태인데 이재 안의 오기와 미련이 함께 합작해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하고 있다. 알고 있는데 멈춰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재는 2절지 안에서 "구(球)"의 크기를 크게 그리고 있다. 눈앞에 놓인 요요한 "구(球)"의 크기는 고작해야 지름 15cm 정도 되려나 싶은데 이재는 그 미련스러운 만큼 그 크기도 키워대고 있었다. 슥슥대는 4B 연필이 종이를 할퀴는 소리가 안 나자, 데생 강사가 이재의 자리에 와본다.


   데생 강사는 웃음을 참는 듯 혹은 너를 어찌하면 좋으냐 하는 눈빛으로 이재를 보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사라진다. 이재가 스스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이재는 명암을 넣기 시작한다.


  '구는 둥근데 선을 직선으로 하는 게 맞는 건가? 그렇다고 곡선으로 그리는 건 좀 이상하고.'

  라며 이재는 혼자 중얼거린다. 그리고는 이 데생이라는 게 형태도 빛도 그림자도 알아야 하는 것이지만 순간순간의 작은 선택들을 화면에 반복하여 쌓아서 완성시키는 훈련이라는 생각도 한다. 


   오롯이 자신이 판단하고 선택한 대로 표현한다는 점이, 그 결과가 그다지 훌륭하지 않을 지라도. 그 점이 이재는 어려운데 재미있다. 자주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점점 나아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매력은 어쩌면 뒤늦게 그림에 빠진 사람들이 더 강렬하게 빠지는 게 아닐까 싶다. 

  겨우 데생 중 "구(球)"나 그리고 있는 형편이지만 고갱의 선택이, 고흐의 선택이 어렴풋하게 공감 가는 이재였다.


   심취해서 선을 주욱 그려대다 보니, 구(球)가 아니라 원반이 되어 있다. 다른 도형은 약간 모자라고 부족한 실력이라도 웃기지는 않았는데 이재는 자신이 해놓은 꼴을 보니,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너무하네.'


   그간 배웠던 역광은 어디로 갔으며 그림자는 왜 저러며 "구(球)"에서 부드럽게 흐르는 중간 단계 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데생 강사가 다가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고 그녀가 그려놓은 낙서를 보고서 


  "보고 웃는 이유가 있어?"

 라고 물었다.  이재는 자신이 중얼거렸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어 놓았다. 데생 강사는 그런 게 자기 스스로 보인다면 많이 발전한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더 해보면 된다고 했다. 더 빨리 잘 그리는 방법 따위는 없으니, 성실한 노고를 들이라는 말도 따끔하게 해 주면서 이재가 잘못 그린 부분을 역시나 그 화살표를 그러가며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완벽한 "구(球)"를 그리지 않았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이재는 예의 그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시간을 확보한 뒤, 침대에 누워 그날 그렸던 "구(球)"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언젠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봤던 조선 백자 "달항아리"까지 흘러서 멈추었다. 

  이재는 달항아리 사진을 찾아서 보다가, 어쩐지 "구(球)"를 그릴 때, 뭔가 아슬아슬 떠오르는 게 있었는데 그건 그 대칭이 완벽하지 않은 달항아리의 형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한쪽은 더 둥그렇고 한쪽은 더 타원형에 가까운 그렇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달항아리의 모습. 


   별 감흥 없이 둘러보던 박물관의 도자기 방에서 달항아리를 보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이재를 토닥이고 안아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도자기에 크게 관심 없던 이재에게 그 백자는 정말 탐이 나는 것이었는데 물레를 끝까지 저어서 바닥부터 윗부분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아래를 따로 만들어 이어 붙여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더 감탄했었다.

보물 백자 달항아리(2005), 白磁 壺, 백자 대호, 白磁大壺(국립중앙박물관, 도자공예-분청사기-백자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을 옹호하고 조선의 예술을 찬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불쾌하리만치 무력하고 측은하게 바라보기도 한 일본 예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의 표현 중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친숙함"이라고 하는 것만큼은 이재는 동의하기도 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공명과 이익의 세계를 넘어서 사랑이 도공의 가슴에 충만할 때 좋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다 했으니, 달항아리를 보면 그 사랑이 도대체 얼마나 충만했었는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 충만한 사랑이 이 시대의 이재에게도 공명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완전한 사랑인가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도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백자 달항아리는 매우 모던(Modern) 하기도 하다. 장식과 그림을 배제하고 절제한 데서 오는 모던함은 그 시대가 지향하던 새로움이었을까? 세월이 훨씬 많이 흐른 시대에 살고 있는 이재, 완벽한 "구(球)"를 그리는데 실패한 이재에게도 달항아리는 여전히 친숙하고 따뜻하다. 


   그것이 모더니즘(Modernism)이 말하는 삶의 보편적인 감각이나, 시간의 흐름 특히 이재가 살고 있는 당대에 대한 독특한 태도가 아닐까. 


  '대단한 백자 달항아리, 모더니즘도 품었구나.' 

  이재는 그 밤에 어쩐지 달항아리를 껴안고 잠이 들고 싶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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