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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Robin Nov 22. 2022

이재 이야기

06.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é) 사이

*

   이재는 웃기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기억해두고서 잘 써먹는 편이다. 그런 이야기나 상황을 듣거나 겪으면 '나중에 우울할 때 챙겨서 써먹어야지.' 하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건 꽤 유용하다.


   해가 짧아져 5시만 넘어가도 어둑해지는 길을 보다가 문득 한참 전, 라디오에서 듣고 그 사연의 주인공 마음에 이입이 돼서 한참을 웃다가 몸서리를 친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아마 원기둥을 그리다 배운 빛의 흐름이나 그 전 원근법을 되새기다 보니, 그 둘에서 "본다"는 근원적 행위를 생각하게 되서가 아닐까?

  

   여하튼 그 이야기인 즉, 사연의 주인공, 여고생은 눈이 좀 나쁜 편인데 그날따라 렌즈도 안경도 없이 집 앞을 나섰다 했다. 집 앞 가게를 가는 길이었댔나? 익숙한 길을 희미하게 감으로 걸어가는데 뒤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그야말로 동네 아는 오빠, 특히 평소 호감이 있던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을 때, 마침 까만 새끼 고양이가 그녀의 한걸음 정도 앞에 있었다고 했다.

  그를 바로 아는 척하기는 쑥스러워 괜히 까만 고양이를 "나비야"라고 부르며 살짝씩 뛰는데 고양이가 자꾸 도망가길래 필사적으로 가서 고양이를 잡았는데 잡고 보니, 그것은 까만 고양이가 아니라 "검은 비닐봉지"였다는 이야기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자신의 친구와 함께 황당해하고 있었다던가.


  이재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그녀였다면 그저 순간적으로 투명인간이거나 하늘로 날아가거나 그저 길바닥이 되어도 괜찮았겠다 싶을 정도의 수치스러움이 쓱 밀려 들어왔지만, 그 순간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웃기고 재미있어 두고두고 우울할 때 꺼내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가 될 것 같았다.

  


  **

    "순간 기억력"을 다루는 게임이나 테스트 같은 것에 이재는 재능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본다"→"저장한다"의 과정이 매우 순조롭다 생각했다. 학창 시절에 "쪽지시험"을 볼 때 매우 잘 써먹었다. 그런 과정을 여러 차례 겪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그 얄팍한 재능에 오만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재는 우연히 범죄 추리를 다루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는 동영상으로 어떤 장면들을 보고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찾아내고 그를 묘사하게 되었다. 파란색 모자를 썼고 키는 중간 키에 주황색 후드티를 입고 청바지를 입었다와 같은 설명을 들은 수사관이 집중적으로 물었다.

  모자는 어떤 형태였는지, 색깔은 기억하는지, 옷의 색깔은 상하의가 어떠했는지 등등 질문이 더 세부적으로 구체적으로 물을수록 이재는 자신이 본 것이 진짜일까, 매우 의심스러워졌고 자신이 없어졌다. 수사관은 그때 매우 중요한 말을 했고 이재는 그 말을 깊이 새기게 되었다.


   "이 진술에 따라서 엉뚱한 사람이 용의자가 될 수 있고 진짜 용의자는 놓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범죄 용의자는 잘 추리했으나 이재가 순간적으로 기억한다고 생각했던 모자의 색깔이 주황색이었고 후드티가 파란색이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녀가 보고 기억으로 저장하는 것은 편집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꽤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의 행위는 시각적인 자극에 더 민감한 이재는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림의 기초를 배우다 보니, 그저 눈에 보이는 것과 아는 만큼 보이게 되는 것의 차이가 주는 신묘함도 어렴풋하게 깨달아가고 있다. 깨우치는 즐거움인가? 생각해보면 배운 기간도 내용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엇을 배우는지, 왜 알아야 하는지, 그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주는 차이일까 궁금해한다.


   그저 주어지는 것이었다면 시간만 때우고 말았을 것이라고 이재는 확신한다.

  

   이재는 눈앞에서 뭐가 번쩍한 듯 한참 전에 읽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라는 미국의 철학자가 한 말을 찾아보고 그제야 그 말이 이재에게 제대로 스민다.


  "관찰이 흥미로워지려면, 즉 중요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주관적이어야 한다."


    객관적 시각을 바탕으로 그것에 어떤 목적성을 두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쓰임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이재는 생각한다. 소로는 또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다."라고 했으니, 무엇을 보려고 하느냐도 어떻게 보느냐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앞선 까만 새끼 고양이가 검은 비닐봉지가 되는 차이라고나 할까.

  소로에 대해 설명해준 에릭 와이너는 한번 더 정확하게 말해준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그 여고생은 거리를 너무 두었나 보다.-

  


    그렇다면 이재의 생각은 본 것-주관적으로 흥미롭게 관찰한 것-은 무엇으로 표시 혹은 표현하는 것이며 의미를 담는 것은 무엇이라 하는지에 이른다.

   이재는 "표현된 기호가 시니피앙(Signifiant)이라면 그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을 시니피에(Signifié)"라고 하는 것을 기어이 찾아냈다. 지적 욕구가 불러일으키는 소란스러움이 와글거린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에 대한 여러 석학들의 이론은 많지만, 이재는 이름만 들어도 어려워 헛구역질이 날 것 같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설명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설명이 그나마 더 이해하기 나았다.-이재는 대학원에서 자크 라캉의 책을 읽고 공부하다가 진짜 헛구역질을 한 경험이 있어, 그녀에게 라캉은 약간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이재는 같은 프랑스인이라도 친절함이 다르다 생각하면서 바르트의 주장을 더 들여다본다. 그는 시니피앙이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 자체이고 그 뒤에 숨어있는 함축적인 의미와 내용이 시니피에라고 했다. 특히  <신화(Mithology)>(1957)에서 어떤 사물에 점점 이야기를 붙여서 눈사람처럼 확대되어 가는 상황을 신화라고 했다.

   

   이를테면 정육면체와 원기둥일 뿐인 사물에 이재가 많은 의미부여를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붙여가면서 하는 이 행위들 자체 같은 것들 말이다. 객관적 사물에 주관적인 관찰과 그것을 표현하는 기호와 의미부여의 과정이 좀 더 특별해지고 있다.

  남들은 모르지만-사실 알 필요도 없다- 이재는 이렇게 점점 자신의 모습을 갖춰가는 중이다.


  그녀가 다음에 만날 도형, 시니피앙은 무엇일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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