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가 처음 밤샘을 해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여름 수련회의 마지막 밤이었다. 산골 어디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고 밥도 각자 해 먹고 그랬던 수련회로 기억하는데 그 밤은 선생님들도 점호를 하고 중간중간 돌아다녔지만 안 자는 애들을 야단치지는 않았던 밤이었다.
그러다 담임 선생님이 이재와 친구들이 있던 쪽으로 왔고 옆 텐트 아이들과 선생님이 함께 앉아서 그 나이대에 빠질 수 없는 무서운 이야기,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 같은 따위들로 시간을 보냈다. 그중 그 밤과 새벽에 이재가 잊을 수 없는 것은 어떤 감각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질 것 같은 별, 깜깜하던 밤하늘이 새벽으로 넘어갈 때 푸르스름한 색으로 바뀌는 것, 그리고 점점 아침이 가까워지면 푸르스름함이 옅은 회색이 되었다가 코랄 빛으로 바뀌는 그 찬란한 시각적 변화와 여름인데 온 몸을 옹송이게 만들던 추위, 깔고 앉아있던 풀에 맺히는 아침이슬의 촉촉함과 콧 속으로 스며드는 새벽의 내음, 이재는 그때 그냥 이렇게 생각했다.
'숨이 달다.'
밤샘을 하고 나서의 그 명료하게 깨어있는 기분은 오히려 신기하기도 했다. 아침 햇빛이 뜨기 무섭게 달궈지기 시작하면서는 발이 땅을 딛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몽롱해지기 시작했지만 처음 밤샘을 한 경험은 꽤 달콤했다.
그래서 이재에게 "빛"은 첫 밤샘에서 가졌던 그것들과 맞닿아있다.
이재가 정육면체로 몇 장을 더 그린 다음, 두 번째로 만난 도형은 원기둥이었다. 마찬가지로 데생 강사는 별다른 설명 없이 테이블에 놓고 사라졌다. 원근법을 배웠으니 그걸 써먹어야겠는데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것이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릴 때처럼 숨이 순간 막힌다.
심호흡을 하고 가만히 바라보면서 안정을 찾으며 보이는 대로-이재는 자신이 보는 게 맞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데생 강사가 나타나서 이재가 그려놓은 장면을 보더니, 일어나라고 한다.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어 이재의 연필과 지우개를 받아 든다. 지난번에는 설명부터 하더니, 이번에는 별 다른 말 없이 데생을 수정해 나가기 시작한다.
실시간으로 뭉텅뭉텅 지워져 가는 그림을 보는데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다. 왜냐하면 지워지는 부분에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 그렸는지, 또 채워지는 부분에서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이 있었음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왜 설명부터 하지 않았는지도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다. 얼굴이 붉어지지만 이재는 뻔뻔해지기로 한다.
'틀리면 좀 어때. 다시 하면 되지.'
그가 이재를 돌아보며 물었다.
"가장 큰 차이는 뭐일 것 같아?"
이재는 원기둥의 윗면과 아랫면의 형태 차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
라고 이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어쩐지 이재는 그 시험에 통과하고 싶어 져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과 그림자라고 말해본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 같았다.
각이 지지 않는 몸통의 둥그스름함을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부드럽게 연결하는 선들의 단정 함이라 해야 하나. 그러데이션이 그럴듯하다. 표현력에 눈길을 뺏기고 있는 이재를 보고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빛을 보라고. 빛이 어떻게 원기둥에 닿아 떨어지는지를 봐."
이재는 이 선문답 같은 시간이 고역이다. 나중에 깨우치고 감탄을 내뱉을지라도 그게 곧바로 들어오지 않으니 뇌가 멈추는 기분이다.
그는 종이의 왼쪽 윗부분에 화살표를 사선으로 그려 넣었다.
"빛의 방향이야."
그리고 화살표를 따라 선을 더 따라 그리고 원기둥의 윗 면에서 멈춘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 윗면에서 가장 밝은 부분을 찾아보라고 한다.
이재는 어색하게 눈을 뜨고 본다.
그는 그림에서 보이는 윗부분을 둥그렇게 표시한다. 이재가 찾은 것과 맞는지 확인하라는 뜻이다. 쉬지 않고 기둥을 따라 내려간다.
다음은 그림자의 방향이다. 빛이 흐르는 방향과 반대편에 존재하는 그림자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그림자가 있음으로 사물의 존재는 실재하는 것임을 보증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입체감을 실현하게 하는 "역광"을 그는 강조한다. 빛이 바닥을 치고 올라오면서 가장 어두운 면의 가장자리에 빛이 나게 하는 것.
다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찾아보라 한다.그러니까 물체에서 반사되는 빛이라면서 그것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하게 설명한다.
이재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는 것과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빛이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모든 밝은 이면의 어두움과 그 어두움이 다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통찰이 주는 즐거움을 그녀는 꽉 쥔다.
이재는 이공계생들이 들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빛의 입자설이니 파동설은 넣어두기로 한다. 그녀에게 빛은 흐르는 것이라고 재정의한다.
흐르다 어딘가 맺히고 다시 타고 흐르는 것. 흐르는 강의 표면에 반짝이는 윤슬처럼, 노랗게 변한 은행잎들에 닿아 흐르는 빛으로 반짝이고 나무의 거친 표면에도 타고 흐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