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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Robin Nov 11. 2022

이재 이야기

03. 아르스 페르스펙티바(Ars perspectiva)로부터

 

*


   이재 앞에 놓인 테이블에 정육면체가 놓이고 보이는 대로 그려보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 '보이는 대로'라는 조건이 그다지 간단한 것 같지 않아서 일단 겁을 좀 먹었다.

  이재의 눈에 보이는 것을 온전하게 자신의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직 손은 둔하기만 하니까.


   그런 이재를 보던 머리를 다듬지 않고 길러 어깨에 닿고 구멍이 난 외투에서 빠져나오는 오리털을 막으려고 청테이프를 붙인 그야말로 '자연인'처럼 보이던 사람이 와서

  "인체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심상의 눈으로도 봐. 네가 바라보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라는 말을 해서 더 기함하게 만들었다. 참 고맙지만 도움은 하나도 안 되는 조언이었다. 인체의 눈도 제대로 안 뜨여 망설이는 이재에게 심상의 눈을 요구하다니.

   

   그런데 한편으로는 초보에게도 진짜 작가가 된 것처럼 조언하는 그는 아직은 대학생인 시절에도 그림이 팔린 적 있는 작가였고 기행이 일상이었으나 매우 열린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머지않아서였다.

 



   어쨌건 이재는 열심히 그렸다. 팔이 떨어져라 그어댔던 선과 명암 처리를 정육면체에 적용해 보는 시간이었다. 배운 원리를 실제로 적용할 수 있다는 굉장히 중요한 앎의 단계이다. 그것이 능숙해지려면 수많은 반복이 있어야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안내받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재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이재의 난장판 정육면체를 보며 데생 강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에게는 이런 난장판을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닐 것이고 연습을 그토록 해댄 선긋기는 어디로 갔는지 명암 처리는 참으로 자유분방한 것은 당연했을 테니 그는 이재를 위로했다.


  "못하는 게 당연하니, 부끄러워하지 마. 처음부터 잘하면 뭐하러 배우러 오겠니?"


   뭔가 부끄럽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말이었다.  이재는 앞으로 시도해야 하는 것들을 앞뒀을 때, 데생 강사의 저 말이 그녀를 이끌게 될 것임을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차원을 다룬다는 말로 이재를 매료시켰던 그는 차원을 다루는데 필요한 것은 "원근법(Perspective)"이라고 했다. 그것은 공간 중의 물체를 전체와 관련지어 포착하고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평면(화면) 상에 재현하는 회화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이재는 '공간 중의 물체'를, 즉 12 cm×12cm의 정육면체를 '전체와 관련'지어, 그러니까 정육면체가 놓인 테이블과 뒤에 놓인 벽, 그것들이 있는 전체 공간에서 '포착한' 장면을 재현해내는 시각적인 효과라고 이해했다.


   그 설명을 듣고 자신이 그린 정육면체를 보니, 전체와 관련짓지도 못했고 포착한 것도 부실했고 그러다 보니, 시각적 효과는 거의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깨달음을 눈치채면서 설명을 이어간다. 원근법의 어원은 라틴어 아르스 페르스펙티바(Ars Perspectiva), 페르스케레(Perspicere)의 '투과하여 보다'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이재의 지적 허영심에 꽤 구미가 당기는 라틴어 유래다.

   그가 특히 데생에서 강조한 '선 원근법'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기하학적인 기초 위에 법칙이라고 할 만큼 유일하게 체계화된 원근법이라고 했고 이재는 속으로 그림은 꽤 많은 계산과 전략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감탄하게 하며 빠져들게 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과학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이성과 논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니, 이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까, 유홍준 교수가 말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는 진실이며 제대로 보려면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전에 이재는 관심과 애정이 생겨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이 남긴 명언,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을 사랑해 왔다.


   이재가 다른 사람에 비해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라면 아마도 그 문장이 준 영향일 것이다. 차원을 다룬다는 말에 매료되고 원근법이 주는 그 의미와 효과가 주는 영향을 알게 되니, 그전에 보던 어떤 장면들도 모두 달라 보이기 시작했고 못 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심봉사가 눈을 떠 심청이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심정이라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 '자연인' 선배가 말한 심상의 눈이라는 게 뭔지도 약간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 이재는 길의 끝을 보고 건물들이 정육면체로 대입해 보면서 온갖 데서 원근법을 찾아내느라 바빴다.


   기억하자. 알게 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먼저임을.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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