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는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는 순간 집 내부를 그야말로 종횡무진 종종 대며 다닌다. 외투를 벗고 가방을 정리한 다음, 손을 씻으러 갔다가 옷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물을 한 잔 가득 마신 다음 화장을 지운다.
그리고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한다. 하루의 고단함이 씻겨 내려가는 그 순간이 이재가 비로소 집에 왔음에 안도하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얼굴에 화장품을 토도독 바르고 자리에 앉으면 이재가 즐기는 혼자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재가 집에 오는 순간에 그토록 효율적으로 움직이려 하는 이유는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는 의도 때문이다.
예전 고등학교 다닐 때, 이재 또래 남자아이들은 당구장을 통과의례처럼 들락날락했었다. 그네들 말로는 당구를 처음치고 온 날, 누워서 천장을 보면 당구공이 굴러다니고 학교에 가서 칠판에 판서를 하는 선생님의 분필을 봐도 당구공이 굴러다니는 환시를 본다고 했었다. 그때는 얼마나 빠지면 그러나 싶었는데 이제야 이재는 그들이 진심으로 이해되었다.
이재에게 그날 배운 것이 그처럼 떠올랐다.
원근법의 마법이라 해야 하나. 이재는 원근법에 대한 아카데믹한 설명 말고 자신만의 해석을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가까운 것은 크고 선명하게, 멀리 있는 것은 작고 흐릿하게."
그 간단한 것을 평면에 구현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천정에 당구공이 굴러다니듯이, 이재의 눈은 아웃포커싱을 해대느라 즐거웠다. 다만 얼마나 잘하느냐는 다른 문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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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정육면체를 그리게 된 사람으로서 좀 쑥스럽기도 하고 곤란하기도 해서 이재는 코를 찡긋했다.
한편으로는 멋있어 보이게 그저 보기 좋도록 그리면 되지, 점선면을 이해하고 고작 정육면체 따위로 원근법을 배우는가?
그것에 대해 이재는 스스로 납득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녀의 까탈스로움이란 이런 것이다. 스스로 납득이 될 때까지 생각하고 찾아보고 의문해 보는 것. 알고자 하는 지적 욕구를 채우는 것은 그녀에게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초창기 서양 미술에서 그림의 역할 중 하나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소통하는 것이었다고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들은 기억이 났다.
말하자면 그림 하나를 두고 어떤 사람이 사람들을 모아 두고 이야기를 하고 이해를 시키고 감화를 주려고 하는 행위는 마치 잠자리에 드는 아이를 위해 그림동화를 읽어주는 행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굳이 선 연습을 하고 기본 도형으로 형태감이나 원근법, 빛의 효과(아마 다음 단계에서 배울 듯) 같은 기초는 원활한 소통을 위한 "탄탄한 구조"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그저 멋있게, 있어 보이게 하는 트릭은 결국 오해를 사게 되어 신뢰를 무너뜨리게 할 수 있으니, 더디더라도 단계를 밟는 수고를 굳이 해야 한다.
어설픈 전달의 오류는 심한 왜곡이 되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이재는 봐왔으니 더욱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의도는 선하다. 결과가 선하지 않을 뿐이다. 왜 그럴까에 대한 것을 이재는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변형, 왜곡)"이라는 용어를 찾아냈다.
이것은 대상을 시각작 영상으로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대상을 고의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미술에서 작가가 자신의 감정표현을 위해 혹은 조형적인 의도를 강조하거나 풍자적인 과장 등을 위해 사물의 자연형태에 보다 주관적인 왜곡을 더하는 것이다.
작가의 실력에 따라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전달받을 수 있는데 반해 그렇지 않다면 정반대의 결과를 맞닥뜨리게 된다.
이재는 글로 혹은 말로 왜곡이 된 적이 없었는가 돌아본다. 더 극적 효과를 위한 데포르마시옹을 의도적으로 이용해 소통의 오류를 일으킨 적은 없었는가?
그녀가 만났던 대상에게 혹은 대상이 그녀에게 무수히 행한 어설프고 탄탄하지 못한 데포르마시옹을 반성한다.
그림으로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탄탄한 구조를 세우는 기초를 배우는 이재는 그것이 글 혹은 말로도 제대로 전달하려는 노력도 함께 더해 보려 한다.
나아가 창조적이고 선한 의도를 잘 표현하는 강조의 수단으로써 데포르마시옹을 올바르게 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