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영Robin Dec 30. 2022

이재 이야기

14. 아우라(Aura)는 자연스럽게, 켜켜이

   서울에서 산 시간이 이재가 살던 고향에서의 시간보다 훨씬 길어졌지만 서울이 고향이라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희한하게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안심되는지 모른다. 아직 돌아갈 계획도 전혀 없으면서 그렇다. (막연하게 노년은 고향에서 보내겠다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고향에 올 때마다 뭔가 벅차다. 서울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마냥 서울로 빨리 가려고 애를 써댔다. 이재가 더 이상 청춘에 머물지 않음을, 아직은 '청춘'이라 우기고 싶은 때가 되어서 오는 고향은 마치 영화를 보다가 필름이 중간에 뚝 잘린 것 같이 불쑥 건너뛴 장면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가 되니, 이재는 어릴 때 맡았던 계절의 냄새가 기억났다. 잠들어 있던 후각이 갑자기 깨어난 것처럼. 이번에도 길을 걷는데, 푸른 잎이 갈색이 되고 낙엽에서 우러나와 공기 중에 퍼져있는 겨울의 냄새를 맡았다. 

  

   고등학교 시절, 교복 위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장갑을 껴도 시린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입김이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은 목도리에 진저리를 치며 자전거를 타면서 맡았던 그 냄새였다. 스모키 한 듯도 하고 바스락대는 소리가 냄새로 변한 것 같은 그 겨울의 냄새가 기억나서 아련해졌다. 


   그 시절의 이재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때 같이 자전거를 타던 인생이 심심하다고 칭얼대던 철없던 친구들은 뭐 하고 있을까. 이재는 그런 생각에 꽤 감성에 젖었다.



   그러다 열여섯 겨울의 어느 장면에서 회상이 멈췄다.


   겨울이어도 눈이 귀한 고향에 어느 오후에 눈보라처럼 함박눈이 많이도 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내리고 쌓이니, 이재에게 그녀의 친구들과 선배, 후배들에게 한 선배가 '산에 토끼 잡으러 가자'며 선동해 댔다. 어쩐지 아직 그들과 낯가림이 있던 이재는 눈 내리는 산에 토끼가 진짜 있는지 어쩌는지, 그 토끼를 어떻게 잡을지, 잡은 토끼는 어떻게 할 건지 온통 궁금한 것 투성이지만 그 들뜬 분위기에 동화되어 따라나섰다.


   학교 뒷산 한쪽은 공동묘지였는데, 그 산을 우루르 몰려갔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이재는 선배 뒤꽁무니나 열심히 따라다녔다.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니, 다리는 터질 것 같고 숨은 가쁜데 재미는 진득해서 내내 웃음을 머금고 있었던 것은 선명하다. 

  어느 한쪽에서 '저기 토끼 간다. 너네가 막아라'는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이리 훌쩍, 저리 훌쩍 뛰어다녔다. 


  짐작한 대로 토끼를 잡기는커녕, 그 꼬리도 토끼 발자국 하나를 못 봤다. 

  

  결국 산속에서 눈을 치우고 얼어있는 땅을 굵은 나뭇가지로 웅덩이를 파고 거기에 주워온 나뭇가지를 넣고 산속에 누군가 버리고 간 신문지를 모아 와서 불을 피웠다. 눈으로 젖은 땅에 불을 피우는 무모함과 산불 나면 다 잡혀간다며 불티가 날아가지 않아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발 빠른 남자 선, 후배 몇 명이 가게에서 쫀듸기 같은 과자를 사 와서 겨우 피운 불가에서 구워 먹느라 그을음이 얼굴에 묻고 서로 놀려대던 그 시절, 행복한 한 때. 갑작스러운 땡땡이였는데도 카메라를 갖고 온 부지런한 아이가 있었다. 

  낯섦과 낯가림이 한순간에 사라진 마법의 순간이 사진 몇 장에, 그 경계를 풀어버린 이재의 행복한 옆모습이 그 사진 속에 남아있다. 


   오랫동안 이재는 그때를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전 내린 눈이 쌓여있는 고향에서 겨울냄새를 맡자마자 이재는 그 숨이 가쁜 채로 서있던 토끼 잡으러 갔던 산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이재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했던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 이재는 "아우라(Aura)"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아우라'란 원래 '분위기' 등의 의미로 20세기 초 독일 사상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예술이론으로 도입한 용어이다. 그에 따르면 아우라는 예술작품에서 개성을 구성하는 계기로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미묘하고도 개성적인 고유한 본질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재가 고향, 겨울, 고유한 냄새를 떠올리면 떠오르는 개성적인 고유한 본질은 "행복"과 "따스함"과 유사한 그것이라고나 할까. 

  벤야민이 아우라를 '유일하고도 아주 먼 것이 아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니 이재가 고향, 겨울, 눈, 냄새를 지금 맡고 아주 먼 시간이 있던 장면이 갑자기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간 것을 보면 너무 동의하는 바이다. 

  그렇게 먼 것이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기이하게 얽힌 짜임'에 기인하고 있다는 말을 이재는 이제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시간과 공간의 기이하게 얽힌 짜임'은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자연스럽게 쌓여 이재의 오늘을 존재하게 한다. 그때 산속에 토끼는 시간과 공간의 기이하게 얽힌 짜임 속에 뛰어다녔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게 그렇게 한 것처럼.


   To be continued.

이전 15화 이재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