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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Robin Jan 06. 2023

이재 이야기

16. 개인적인 시대정신(Zeitgeist)을 찾아서


*


  이재는 집에 깊게 들어오는 겨울 햇살 속에 앉아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상실의 슬픔에 관한 책, 제인에어를 비틀은 서스펜스, 평범한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긴 책을 번갈아가며 읽고 있다. 어느 하나 주제의 일관성은 없지만 이재의 욕구를 반영한 책들이다. 

  특히 제인에어를 비틀은 서스펜스는 어쩐지, 새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의 분위기가 났다. 그 막장스러움 사이에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망이 너무 천연덕스러웠던 분위기가 연상되었다. 은밀한데 적나라하다. 


  이재는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다. 이 책 읽다가 이야기가 지겨우면 그 책 닫고 다른 책으로 옮겨간다.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들인데 동시에 읽다 보면 희한하게 서로 연결되어 통찰을 줄 때가 있다. 그런 발견의 기쁨은 이재(怡栽)의 복잡한 독서습관이 되었다. 

 

  어쨌든 서스펜스가 좀 늘어진다 싶어서 책장을 닫았다. 하릴없이 책꽂이에 이재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둘러보다가 두꺼운 하드커버로 덮인 사전류를 꺼내 들어 무심히 넘기다가 "시대정신(Zeitgeist)"라는 단어에 눈길이 멈췄다. 



  언젠가 이메일 아이디가 zeitgeist였던 이가 떠올랐다. 이메일 주소를 묻다가 생소한 단어에 몇 번이고 다시 묻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물어보고 소리 내어 보다가 익숙지 않아서 혀가 오그라들던 'zeitgeist(자이트가이스트)', 발음을 알려주며 웃음 짓던 이와의 어느 한 때가 생각이 나서 순간 애틋해졌다. 


   'zeitgeist(자이트가이스트)'에 대해 알아볼 생각은 거의 안 하고 그 단어만 수줍게 입에 물고 다녔다가 그 사람이 유학을 떠나고 나서야 논문을 쓰려고 빌린 논문, 책, 그리고 딴생각을 하려고 빌린 책에서 그 단어가 쉼 없이 나타나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의 빈자리를 보고서야 깨달은 마음과 비로소 알게 된 시대정신(Zeitgeist)의 의미 때문에 이재는 욕구 앞에 솔직하지 못했던 그때를 후회했다.  

  

   그러니까, "시대정신(Zeitgeist)"은 문자 그대로 어떤 특정 시대를 풍미한 감정 상태와 사고 경향을 의미한다. 

   그 발음이 이재가 익숙지 않았던 것은 독일어이기 때문이었다. 제2 외국어는 둥글둥글한 불어였지, 모서리가 뾰족한 독어는 아니었으니 그 뾰족한 단어가 이재의 마음을 찌를 것을 알았다면 진즉 배워놓을 걸 그랬나 이재는 삐죽 대기도 했었다. 


   "시대정신(Zeitgeist)"은 미술에서는 어떤 시대나 특정 시기에 전반적으로 보이는 고유한 속성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1890년대 세기말 미술의 멜랑콜리 경향이나 1960년대 낙관주의 정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전통과 역사를 수용하는 태도 같은 것들을 말할 수 있다. 



**

   어긋난 타이밍과 애수 속에 그가 있었던 시절의 zeitgeist는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쯤 되려나, 이재는 그를 떠올려본다. 때때로 충분히 사랑할 수 없었던 이에 대한 회한이 순간적으로 사무칠 때가 있다. 

  어쨌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는 게 맞다. 귀한 단어를 알려주고 한 번쯤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 있으니 풍요롭다 여기기로 이재는 정리한다. 


   그러다 이재는 현재 그녀의 "시대정신(Zeitgeist)"은 "mingle-mangle(뒤범벅)"로 정해버렸다. 다소 충동적이긴 한데 그 발음이 주는 재미-밍글맹글-가 다소 유머스럽기도 하고 의미도 상상과 현실의 뒤범벅이라고 정하고 보니, 직설적이어서 오히려 좋았다.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의 시작이라면 더 그럴듯하다. 이재는 올해 키워드로 "부여(附與)"로 하기로 한 것처럼 조금씩 기지개를 켜어보려 한다. 기회를 부여하거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이재는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구와 욕망도 건강하게 표출하는 것도 필요할 텐데 생각해 보면, 그게 다 조금씩 성가시고 번잡스럽긴 하다. 그래서 mingle-mangle의 시대정신이 매우 요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핑거스미스의 수, 제인에어를 비틀은 제인스틸만큼은 아닐지라도.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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