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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Robin Jan 10. 2023

이재 이야기

17. 은밀하고 소소한 데카당스(Décadence)를 위하여 

*

  이재(怡栽)는 당분간의 뮤즈인 아그립파를 열심히 데생 중에 있다. 

  한편 데생을 하면서 이재의 은밀하고 소소한 즐거움은 연필을 깎는 행위이다. 4B 연필을 평상시 연필과 달리, 과감하게 깎을 수 있다는 게 일단 큰 재미이고 그다음은 깎는 행위 자체의 그 단순한 공들임이 매우 기껍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데생이 좀 지겨울 때, 딴짓을 하고 싶은데 그 마음을 들키지 않을 듯한 행동이라는 데에 있다. 데생 강사가 모를 리 없고-그도 언젠가 그랬을 테니까- 같이 데생을 하는 사람들 또한 비슷할 것으로 모두 암묵적으로 눈감아 주는 행위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재가 다니는 화실의 쓰레기통은 꽤 크다. 지우개 찌꺼기, 종이, 물감, 깎여 버린 연필의 잔해 따위들이 들어있는 그 쓰레기통의 위치는 꽤 안심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연필을 깎을 때 맡을 수 있는 나무와 흑연의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어오면 이상한 쾌감이 들곤 했다.


  게다가 그 쓰레기통 근처 테이블 위에는 "빈사의 노예상(죽어가는 노예상)"의 석고상이 놓여 있다. 이재는 사람들의 은밀하고 사소한 즐거움과 암묵적 딴짓에는 장난의 협동심도 뒷받침되는 것인가 나른한 미소를 띠며 슬그머니 동조하게 되기도 한다. 

  그 동조한 암묵적이고 짓궂은 장난은 빈사의 노예상 성기 그리고 겨드랑이에 음모와 체모를 그려놓는 그것이다. 처음에 시작한 이가 누구일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장난이 시작된 것은 오래되었을 테고 그림 그리려 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인 것만큼 이재가 처음 봤을 때도 이미 매우 사실주의적 표현이 되어 있었다.

<빈사의 노예상>, 미켈란젤로, 1513-1516년, 대리석, 229㎝, 파리 루브르 미술관.

   이재가 미켈란제로의 조각 중 가장 미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조각은 미완성의 그 "빈사의 노예상"이었다. 500년이 흐른 지금 그 빈사의 노예상은 여전히 자유를 속박당한 채로 매우 데카당스(décadence)하게 화실 쓰레기통 위 테이블에 서 있는 것이 참 안쓰럽다고 생각하곤 했다. 



**

*EXTRAVAGANZA-자유로운 구성, 시시한 주제, 복잡한 의상과 무대장치를 특색으로 하는 코믹 오페라나 뮤지컬 코미디 따위

  

  그러니까, 데카당스(décadence)는 '퇴폐'라는 뜻으로 문화의 미적 퇴폐 과정과 그 결과 또는 난숙기의 예술적 활동이 그 정상적인 힘이나 기능을 잃고 형식적으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이상한 감수성, 자극적 향락 따위로 빠지는 경향을 말하는데, 화실의 <빈사의 노예상> 석고 모조품은 그 모든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종종 쇠퇴기에 있어서 사회 전반의 부패 현상에 대응하는 탐미주의나 악마주의의 형태로 되어 극단적인 전통 파괴, 배덕(背德), 생에 대한 반역 등을 수반한다는 것에 비춰보면- 쇠퇴기, 사회 전반의 부패 현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적절한 게 아닐까 이재는 그런 비교가 마음에 들어 혼자서 은밀하게 웃는다.



   한편 언젠가 이재 자신에게 기쁨을 심는 은밀하고 사소한 데카당스는 "음주"였다. "음주"의 매우 욕망적이고 소비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특성에 이재는 한동안 탐닉했고 매우 자발적으로 지배당했다. 그럴 때 프랑스와즈 사강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던 말에 그녀는 매우 동조했으니까.


   원래 술은 함께 마시고 즐겁게 마시는 것이라고 배웠고 '혼자' 술 마시는 행위는 극도로 퇴폐적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아마 술을 처음 배우고 멋모르고 마시던 때에는 자고로 '술이란 같이 죽자고 마시는 것'이었다. 특히 대학원에서 만난 술 좋아하는 무리에 둘러싸여 그야말로 "빈사의 노예" 그 자체였던 대학원 시절의 혹독한 시간을 견뎠다.

  그리고 술을 배우고 익숙해지던 시기였다. 소주, 맥주, 와인, 약주, 데낄라, 사케, 막걸리, 동동주, 그리고 보드카까지 온갖 술을 사람들과 함께 섭렵하고 다녔다. 각종 숙취에 시달리며 그 빈사의 노예 기간에 꾸역꾸역 적응해냈다. 그래도 혼자는 마시지 않는 철칙이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인간관계가 지리멸렬해지고 함께 마시는 술의 기쁨과 즐거움이 옅어지면서 맛있는 음식에 한두 잔 곁들이는 마리아주의 맛에 눈을 뜨게 되면서 그녀 혼자 즐기는 시간을 늘려 갔다. 그렇게 할 줄 아는 요리가 늘어가게 된 것도 그 혼자 마시는 술 덕분이었다. 

  산다는 것의 고단함과 살아내지 않고서는  별 수 없는 지난함, 무색무취의 보드카지만 포장만은 그럴듯한 앱설루트처럼 낮에는 웃는 가면을 쓰고 밤에는 무표정해지는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 이재는 하루를 그 음주를 위해 살았던 시기가 도래했었다. 즐긴다는 느낌보다 자학의 느낌이 점점 더 커져갔다.

  


   자기기만의 억울함을 자기 파괴의 욕망으로 대체하던 때였다. 데카당스가 전시대 문화의 붕괴를 촉진해서 새로운 발전 능력을 낳는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하듯이, 이재 자신의 데카당스는 새로운 발전 능력을 가져왔을까?

  발전은 모르겠고, 그저 자기기만이 만든 허상에 결코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결심은 할 수 있었다. 그 허상에 길들여지지 않음으로 예상 가능한 어려움이 이재에게 들러붙어있지만 자기 파괴적인 데카당스, 즉 음주는 많이 줄어들었다. 알콜이 혈관에 퍼질 때의 감각도 맛있는 음식과 딱 맞는 마리아주가 주는 미각의 즐거움도 그외 자학도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어졌다.


  그렇게 또 한 파도가 지나간 모양이다. 음주에서 그림이라는 파도로 옮겨가는 게 아닐까? 이재는 자신이 멈추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시간이 좋다. 

  이재의 현재 은밀하고 사소한 데카당스는 그런 흐름일 것이다. 흐르기 위해서는 메마르지 않아야 한다. 이제 그런 것을 깨닫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이재의 새로운 발전 능력이 될 수 있지 않으려나.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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